나는 나의 조국,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갈 것입니다.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고향,

그곳이 나의 전부입니다.

약간 허스키하면서 굵은 저음으로 독일어로 말하는 윤이상 선생의 목소리는 장중한 그의 음악과 같다.

Das ist mein Ganzes!

그곳이 나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레이션, ‘한 목숨이 끝나는 곳에서 고향은 가장 빛나는 유산을 받았다‘.

이것은 2004년 10월 3일에 방송된 SBS 일요스페셜의 첫 장면이다.

여기서 ‘빛나는 유산’이란 무엇인가.

세계 음악계에서 20세기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평가되었던 그의 업적은 이미 대한민국과 그의 고향 통영에 큰 명예를 안겨주었고, 그를 기리는 통영 국제음악제와 윤이상 콩쿠르,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통영 국제음악당, 그리고 이러한 것들로 인해 유네스코가 지정한 ‘음악 창의 도시’ 등 유형·무형의 많은 유산들은 통영을 빛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스페셜에서 말하는 ‘빛나는 유산’이란 그런 것들이 아니고 그의 위대한 음악 자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그의 난해한 음악들은 이 스페셜을 통하여 하나씩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해설하는 음악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윤이상 음악은 현대 음악 중에서도 난해도가 매우 높은 음악으로 동양적인 음을 서양 악기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이를 난해한 현대 음악의 범주에 넣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작업이라 한다.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히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그것을 써두려고도 하지 않고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그러나 그는 지금 고향의 온기 속이 아니라 겨울이면 오후 4시 이른 시간에 해가 지고, 춥고 음습한 곳인 베를린의 외곽 카토우 시립 묘지에 묻혀 있다.

며칠 전 영부인께서 그곳을 방문하여, 고향 통영이 보고 싶어 일본에서 배를 타고 통영이 보이는 곳까지 오셨던 그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고자 통영의 동백나무를 심으셨다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이에 대한 언론과 네티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영부인으로서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다고 비난하는 측에서는 ‘윤이상은 유럽에서 활동한 북한의 문화 공작원’이란 전제하에 ‘예술은 국경이 없어도 예술가에겐 국경이 있다’라는 논지로, 더구나 오길남-신숙자 사건을 들어 공작원으로서 구체적 행위를 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윤이상 문제는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간첩, 빨갱이로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두려운 문제’, ‘서로 거론하기 싫은 문제’, ‘무섭고 복잡한 문제’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찌 보면 간단하고 명료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윤이상 문제는 그가 꿈꾸고 그려왔던 민족의 화해와 민주화, 통일에 대한 염원에 시각을 맞춰 보느냐 아니면 동백림 사건에 대한 당시 정부 발표대로 간첩행위, 친북 활동에 시각을 맞춰 보느냐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진다. SBS의 일요 스페셜과 인물 현대사 두 편 그리고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은 윤이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깊은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자료를 친북 좌파 측에서 편파적으로 만든 것으로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일축해 버린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윤이상을 북한의 문화공작원이라고 보는 측에서는 오길남 사건이야말로 윤이상이 북한의 문화 공작원으로서 활동했다는 구체적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윤이상은 ‘오길남 사건과 나’라는 글에서 첫째 그를 북한에 가라고 한 적이 없으며, 둘째 그의 가족을 구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사건의 성질 상 북한 당국의 협력을 받기 어려웠다는 경위와 어렵사리 구한 가족사진과 녹음테이프에 대해 울기는커녕 ‘자식들이 못생겼다’, ‘더 이상 가족을 찾지 않겠다’는 둥의 말을 듣고 ‘두 번 다시 날 찾아오지 말라’고 호통을 쳐 내보냈다는 것을 자필로 기록하여 공개하였다. 그리고 그의 딸인 윤정은 오길남을 들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고발을 해 놓은 상태이다.

물론 이 문제는 사실관계가 해결하겠지만 가족을 먼저 탈출시키지 않고 혼자 탈출한 그의 행동과 사람됨에 비추어 보아 그가 한 말을 믿을 수가 있는 지 상식이 판단할 일이다.

필자에게는 스승과 같은 아우님이 있어 ‘윤이상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하고 물었더니, ‘윤이상 선생은 우리 정국이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로 교차될 때마다 늘상 회자되는 경계–낡은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선상-에 선 분이 되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로, 바람 앞의 촛불로, 밀실의 등불로… 꺼졌는가 하면 켜지고, 켜졌는가 하면 꺼지는 등불.

언제까지 이렇게 불안한 등불로의 시간이 지속되어야 하는지, 꺼지지 않는 등불로 빛을 발할지… 통일이 되면 이 불안한 바람도 잠들 수 있을는지요‘라고 답을 보내 왔다.

윤이상은 과연 경계선 상에 서 있는 사람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그가 석방된 후 어떤 행보를 하였는지를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음모를 꾸미고 사건을 획책하는 공작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38선의 공백지에서 민족 화해와 통일에의 열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민족대음악제를 제안하였으며 1990년에는 범민족 통일음악회와 서울송년음악회를 추도하고 성사시켰다. 범상한 이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큰 행보를 하였다.

윤이상은 운명하기 일 년 전인 94년 12월 17일 도쿄 게이오 프라자 호텔에서 마지막 성명을 발표한다.

「나 윤이상은 해방 후 오늘까지 민족 분단의 커다란 비극을 극복하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개인적으로나 단체의 성원으로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나의 입국 문제와 관련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너무도 졸렬하여, 마치 장마당에서 생선을 놓고 흥정하는 장사꾼과도 같았다. 나에 대한 명예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이런 태도와 때를 같이 하여 내가 거주하는 베를린에서는, 소위 운동권에 속한다고 하는 몇몇 과격분자들이 나의 고국방문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극한적인 투쟁방법으로 초비상사태를 연출하기 시작하였다. 이유인즉 안기부가 재벌과 짜서 나를 매수하여 한국의 운동권에 배신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상사태를 사전에 겪은 병약한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나의 순수한 양심인 민족 화해와 통일의 비원이 사실의 날조와 악의에 찬 중상모략으로 여지없이 짓밟히는 현실에 비추어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정치적 모략의 도구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절대적 이상인 민족애와 통일에 대한 충정을 앞으로는 나의 음악이 대변할 것이다.」

이 도쿄 성명서는 윤이상의 신념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성명서의 핵심은

‘나의 순수한 양심인 민족 화해와 통일의 비원’

‘정치적 모략의 도구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

이 두 마디다.

이러한 순수성이야말로 그를 배척하는 사람이나 지지하는 사람 모두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힘을 가진다.

‘사과’하면 고국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제의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므로 그는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고향의 방문과 조상의 묘를 찾고 싶어 했던 소원마저 포기하였다.

가톨릭 박해시대, 순교자에게 ‘배교’하겠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순교자는 죽음을 택하였다. 이처럼 윤이상은 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탄생 100주년은 그 의미가 크다.

100년이란 세월은 모든 것을 화해하고 녹아내릴 수 있는 무게를 가진다.

그런 뜻에서

대한민국의 음악계를 중심으로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그의 소원대로 38선의 공백지에서 민족 대음악제를 개최한다면 이 땅을 떠나지 못해 아직도 구름 위에 맴도는 상처받은 용은 창공으로 훨훨 날아올라갈 것이다.

그는 고향 통영 땅에 빛나는 유산, 위대한 유산을 남겨두고 떠났다.

통영 사람들이 뜻을 모아 그의 유해를 고향으로 봉환하는 일은 그에 대한 보답이 될 것이다.

그를 기념하는 음악당 아래 바다가 잘 보이고 파도소리가 들리는 곳에 그를 잠들게 하자.

추운 베를린에서 잠들고 있는, 상처 입은 용의 눈물은 고향만이 닦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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