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만세운동의 시발점 북신동 송정택 사랑방…100년 역사의 산실

▲ 송두영의 장남 송종설씨.
▲ 통영독립운동의 산실인 송정택 사랑방의 주인공 송정택 어르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화동 송정택 사랑방은 독립운동 보다는 훨씬 후대의 산물이나 허물어가는 통제영 공방의 목재로 지은 의미 깊은 곳이다. 사진은 문화동 송정택 사랑방에서 열린 송씨 문중 잔치를 기념 촬영한 것이다. 사진 맨 뒷줄 오른 기둥 옆 갓을 쓴 어르신이 송정택씨이고 그 옆으로 맨오른쪽 까까머리 학생이 송정택의 3남인 송두영씨이다. 사진은 송두영의 장남 송종설씨가 제공했다.



1919년 3월 8일 송정택 사랑방 19명의 통영청년…통영장날 3.13 통영만세운동 결의
북신리 송정택 사랑방 1917-1923년 존속, 4회 3천700여 명 통영만세운동 시발점
오중주통제사 휘하 송덕창 후손…손자 송종설씨 "송정택 사랑방…3.1운동 역사유적"

"철석같은 우리의 신념, 벽력같은 우리의 함성, 적의 창과 투구는 이미 땅에 떨어졌나니, 소양한 천지, 구십춘광 거칠 것, 막힐 것 없는 정의의 개선, 회천동지(回天動地)의 나팔이다. 강산을 뒤흔드는 함성, 아침 해 칠색영채에서 오려 온 韓(한) 나라 簇竿(족간), 이천만의 손으로 매어울리렴, 하늘 높이 靑天(청천)까지…나라 생각 외에 일절 구구한 욕심은 도적질이다. 우리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다오" <진평원의 동포에 격하노라! 중에서>

일제강점기 그 힘든 터널을 건널 수 있었던 광복의 시발점은 이미 100년 전 1919년 3월 만세운동으로부터 출발했다.

목숨 건 통영 만세운동의 출발은 1919년 3월 8일 경성 배재고에 재학 중인 진평헌이 귀향, 양재원 권남선 등 19명의 청년이 송정택 사랑방에서 거사를 결의하면서 시작된다.

D-데이는 3월 13일(음력 2월 12일) 통영장날이었다. 하지만 일본인의 밀고로 10일 새벽 일본 경찰에 발각, 주모자 모두 체포, 투옥된다.

그러나 당시 하와이로 망명, 미주국민회 간사로 있던 고채주(당시 59세)가 밀입국, 20일 후인 4월 2일 현 통영시 중앙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켜 3천여 장꾼들과 합세,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사건으로 일경에 붙들린 주모자 3명이 대구부산형무소에서 1년∼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이들 가운데 이학이(당시 22세), 허장완(당시 21세) 등 세 열사가 옥중에서도 독립정신을 굽히지 않아, 심한 고문에 의해 옥사하거나 가석방돼 나와 숨졌다.

특히 4월 2일 시위에는 예기조합의 기생 33명도 금비녀와 팔찌를 팔아 소복차림으로 시위대열에 동참했다는 감동적인 기록도 있다.

통영의 시위는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총 4회 3천700여 명의 지식인, 청년 학생들이 주축이 돼 차츰 각계각층 시민들이 참여했다.

현재 원문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3.1운동 기념비는 통영인으로서 3.1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희생을 당한 애국지사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1972년 9월 충무 시민의 이름으로 남망산 광장에 세웠다가 1991년 원문공원으로 이설,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럼 100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목청 높여 부르게 한 역사의 시발점이 된 송정택의 사랑방은 어디이며, 19명의 청년을 모이게 한 송정택 그는 과연 누구일까.

송정택은 세병관 기판에 기록돼 있는 제82대 오중주 가선대부삼도통제사(1701.10-1708.10 재임) 휘하의 종6품 전주부 송덕창(宋德昌·후에 종3품 절충장군으로 승계)의 후손이다.

송정택은 제적등본을 보면 1885년 5월 20일 광도면 안정리 상촌 1665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춘암이며 명필가로 서예에 능한 선비이고 유학자였다.

그는 한 해 약 8천석을 추수하는 대지주로서 종이섬이라 불리는 지도는 물론 안정리 일대의 상촌, 중촌, 하촌과 동해면, 거류면, 통영 한실 등 여러 곳에 넓은 논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인심이 후덕하고 덕망이 높아 소작인들과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당시 소작인과 지주의 분배가 4:6이었으나 가뭄이나 홍수로 인해 흉년이 들어 소출이 줄어들면 그 비율을 6:4로 하여 소작인의 어려운 형편을 도와 소작료를 저감해 주었다.

북신리 송정택 사랑방 1917-1923년 존속, 4회 3천700여 명 통영만세운동 시발점.


안정리에서 통영읍 북신리 215번지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통영청년단과 교유하며 민족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갈수록 일제의 탄압과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수탈은 심해져 가고 만세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한 감시의 눈빛도 살벌해져 가는 시기에 통영의 청년들이 자주독립에 대한 열의와 헌신을 잃지 않고 다짐하게 하는데 있어서 사랑방의 역할은 실로 컸었다.

제적등본과 등기부에 따르면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송정택 사랑방은 북신리 215번지이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이 집에 이사하고 1923년에 판 것으로 공부상에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송정택 사랑방이라 알고 있는 문화동 86-1번지 현재 문화유료주차장 터로 옮겨간 것이다.

송정택의 손자인 송종설(1947년생·73세)씨에 의하면 사랑방은 문화동 86-1번지가 아니라 북신동 215번지 한옥 기와집이라고 한다.

송정택의 삼남인 송두영(송종설의 부친)이 북신동 215번지에서 통영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문화동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송종설 씨는 "아버지(송두영)와 고모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아주 깊은 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하인들 몰래 정기적으로 집으로 들어오면 할아버지(송정택)께서 천으로 싼 돈을 몰래 전달하는 것을 봤다고 말씀하셨다. 군자금이었다"고 말했다. 

1923년 이 집을 판 연유도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해졌기 때문이라는 소리도 들었다고 했다.

공부상으로 보면 이 집은 후에 아버지 송두영의 친구인 탁진수씨가 매입, 탁주 양조장으로 사용해 후대의 사람들은 '송정택 사랑방' 보다는 '탁씨 도가'로 많이 알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동 86-1번지의 한옥집과 송정택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송종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가 삼도수군통제영 경내에 있던 12공방을 훼파하고 부술 때 이를 본 할아버지 송정택이 안타깝게 여기고 부서져 버린 공방의 오래된 목재를 구입, 문화동 86-1번지에 한옥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문화동 집서 송씨 집안사람들이 잔치도 하고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화동을 독립운동 당시 송정택 사랑방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방 후에는 송정택을 비롯한 읍내 유지들이 모여서 일제에 의해 훼손돼 있는 착량묘를 보수공사 하기로 의논했다.

이때 송정택은 세병관 운주당 뒤편에 있던 일본 신사건물을 부수고 돌을 가져와 착량묘 마당에 깔아 밟고 다니자고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착량묘 바닥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와 함께 석공, 인건비, 운반비 등 일체의 비용을 송정택이 부담하기로 하고 쌀 50가마를 선뜻 내어 놓기도 했다.

이후에는 송정택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그 기록은 동아일보를 비롯 당시 신문기사에 그대로 수록돼 있다.

손자 송종설씨는 "올해가 3.1절 100주년이다. 북신동 송정택 사랑방은 단순 우리 집안의 흔적 뿐 아니라 통영 독립운동사의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다. 특히 원형이 보존돼 있는 점에서 그 역사성과 보물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내 세대가 끝나면 잊혀질 역사인 것이 더 두렵다. 모두가 허물어지고 사라져 가는 현실에서 3.1 독립운동의 산실인 이 집 앞에 표지판은 물론 통영독립운동 100년 교육사의 한 장으로 활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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