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경남도의원

 

올해 여름은 여러모로 싱겁게 끝이 났다. 환갑을 맞이한 한산대첩축제도, 성대하게 계획했었던 섬의 날 행사도 모두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강구안과 시내 곳곳에 넘쳐나던 관광객들의 자취 또한 찾을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는 여름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세병관의 늠름한 기품이 조금은 쓸쓸해 보인다.

세병관 앞마당을 둘러보다 마당 한켠에 서있는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를 발견했다. 으레 통제영 내에 서 있는 여러 비석들 중의 하나 쯤 아닐까 생각했는데, 안내판을 읽어보니 그러한 생각은 보기 좋게 틀렸다. 이 비석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통제영을 한산도에서 처음 개설한 이래 고성·거제를 전전하다 1604년 이곳에 자리를 잡게 한 제6대 이경준(李慶濬) 통제사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제19대 구인후(具仁垕) 통제사가 당시 창원대도호부사를 맡고 있던 박홍미(朴弘美)에게 비문을 부탁하여 1625년에 비석을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비문이 국역된 통영시지(統營市誌)를 펼쳐 보았다.

바닷가 한 갯벌 포구 소금 땅(一海港瀉鹵之地), 여우와 토끼가 노니는 황무지 언덕(荒楱狐兎之墟)에 불과한 두룡포를 이경준 통제사가 훌륭한 요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충무공이 앞에 왜적을 무찔러 나라의 중흥을 거두었고(忠武克敵於前 以收中興之積), 공이 뒤에 통제영을 설치해 만세의 이로움을 이룬 것은(公設鎭於後 以爲萬世之利) 앞뒤 두 명의 이씨가 부임해서 이루었다(前後二李之出)라고 평가했다. 즉, 통제영을 개설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훌륭하지만, 현재의 통제영 자리를 발견하고 건설한 이경준 통제사 역시 충무공에 버금갈 만큼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통영(統營) 역사의 시작과 형성이 바로 통제영(統制營)의 역사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두룡포기사비는 한국 역사로 볼 때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신시(神市)를 세운 것이요, 미국 역사에서 영국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첫 발을 내딛은 것과 같은 통영 역사의 출발점이자 신기원(新紀元)의 이정표라 하겠다. 한마디로 이 비는 통영(統營)의 출발점을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유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는 오랫동안 잊혀지고 방치돼 있었다. 처음 건립 당시 남문 포구 앞 어딘가에 있었던 것을 1904년 현재의 세병관 경내로 옮겼다는 기록만 있을 뿐 처음의 정확한 위치조차 모른다. 통제영 역사의 시작을 알려주는 두룡포기사비도 이러할진대, 다른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

단적인 예가 2014년 무전동에서 발견된 20여 기의 통제사 비석군이 아직도 정리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통제영의 주요 건물들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열린 통제영 복원계획에 대한 종합 토론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즉, 통제영 복원계획이 부실한 기초 자료에 근거하다보니 복원의 시점도 명확하게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합적 접근보다는 행정편의에 맞게 땜질식 내지 부분적 짜깁기 형태의 계획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통영이 너무 이순신, 거북선, 한산대첩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러한 유산들이 주는 국민적 인지도나 파급력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작 이경준 통제사가 1604년 개영(開營)한 이래 1895년 폐영(廢營)될 때까지 301년의 역사를 간직한 통제영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 없었던 것이 아닌지 부끄럽다. 그저 건물 몇 개 짓고 관광객을 유치하거나 UNESCO(유네스코)와 같은 국제기구에 통제영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과 같은 보여 주기식 시각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닌가? 솔직히 통제영 복원과 관련해 행정에서 역사와 문화에 입각한 제대로 된 시각과 기초조사가 있었는가? 대충 현실과 타협해서 빠른 성과를 내는 사업에만 골몰하지 않았는지는 행정이 보다 잘 알 것이라 생각된다.

생각해보면 통제영 복원은 조선수군 총사령부의 지위에 맞게 현재 남문과 병선마당까지 바다를 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조선 5대 주전소(鑄錢所)에 맞게 특색 있는 유적들을 보전하고 연구해야 한다. 또한 통제영의 삶이 기록된 여러 문헌을 찾고 연구해 소위 “통제영 컨텐츠”의 기초 자료를 축적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통제영 기초자료에 대한 철저한 연구나 준비 없이 통제영 복원을 진행해 나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우물 앞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 될 것이다. 기초 연구라는 밥도 짓지 않고 어떻게 통제영 복원이라는 숭늉이 나올 수 있겠는가?

앞으로의 과제는 분명해졌다. 행정의 조급함을 버리고 통영의 정체성을 바로잡는다는 역사적 책무를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통제영 복원 계획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통제영 복원의 의미를 함께 나누는 일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통제영 복원은 곧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과 혼이 스며있는 우리의 공간을 기억하고 되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통제영 복원 사업은 단순히 건물 몇 동을 복원하는 토목 사업이 아니라 그야말로 진정한 통영(統營)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통영인의 자긍심을 더 높이는 역사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종합적 역사문화 정신복원 사업이기 때문이다.

깊어가는 가을 밤, 지혜로운 계책으로(運籌) 왜적들에게 항복을 받아(受降), 전쟁을 멈추고(止戈) 병기를 씻어(洗兵) 한가로이 태양을 바라보면서(望日) 평화를 다짐하던 통제영 설치의 본뜻을 새기면서, 시민과 함께 통제영 복원의 바른 길을 찾아 나갈 것을 다짐하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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