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갑로 영남이순신연구소 소장

박갑로 영남이순신연구소 소장.

임진왜란 당시에 경상우도감사(慶尙右道監司)로서 난중일기(亂中日記)에 30여 회나 등장하는 약봉(藥峰) 서성(徐渻)이란 인물이 있다. 1594년 4월 10일 경상도 순무어사로 내려왔다가 1595년3월 28일 경상우도순찰사(경상우도 관찰사, 監司)로 다시 내려왔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최근에 필자는 서성의 문집을 일별할 기회가 있었는데, 약봉유고(藥峰遺稿)에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한산도(閑山島)에 관련된 시를 여러 편 발굴했다.

약봉(藥峰) 서성(徐渻)은 본관이 대구이다. 1558년(명종13년) 출생해 1631년(인조9년)에 사망했다. 부친은 서해(徐嶰)이고 외조부는 안동 임청각(臨淸閣)을 지은 고성이씨 이명(李洺)의 아들 이고(李股)이다. 부인은 송녕(宋寧)의 딸 여산송씨이며 영의정을 지낸 송일(宋軼)의 증손녀이다.

이고가 사위와 딸 부부를 위해 지어준 집과 누정이 안동시 일직면에 있는 유명한 별당 소호헌(蘇湖軒,보물 475호)이다. 서성의 모친 고성이씨 부인은 대구서씨 후손들이 신사임당 만큼이나 기리는 분이다. 부군(夫君)인 서해가 23세에 요절하자 가산을 정리해서 시숙이 있는 한양으로 이사를 했고, 아들 서성을 이율곡(李栗谷)에게 배우도록 했다. 이때 학비를 보태려고 음식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그것이 약과(藥果)와 약식(藥食)으로 이름 지어 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서성의 5대조 서미성(徐彌性)은 조선개국공신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사위이다. 서미성의 둘째아들이 동문선(東文選)을 지은 유명한 학자 서거정(徐居正)이고, 장남 서거광(徐居廣)의 현손이 서성이다. 조부는 문과(文科)를 하여 예조참의를 지낸 서고(徐固)이다. 서미성의 사위에 좌의정을 지낸 삭녕최씨 최항(崔恒)이 있다.

서성의 넷째 아들인 서경주(徐景霌)는 선조의 첫째 딸 정신옹주(貞愼翁主)와 혼인해 달성위가 된다. 서경주는 명량해전 때 전라감사 황신(黃愼,西人, 본관 창원)으로 부터 임지를 이탈했다고 무함(誣陷)을 받아 한양의 감옥에 갇힌 나주목사이며, 전 순천부사 안촌(安村) 배응경(裵應褧)을 우찬성 심희수(沈喜壽)와 함께 신구한다. 전란이 끝난 후 안촌은 백암(栢巖) 김륵(金玏, 체찰부사로서 한산도를 방문해 이순신을 지원)과 함께 경북 영주에 이산서원(伊山書院)을 건립하고 퇴계집을 간행하는 등 퇴계존숭작업을 한다.

그 서성이 이순신이 쓴 시의 운을 따서 시를 짓고, 한산도와 남해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지은 것을 필자가 최근에 찾았다. 약봉유고를 보면 서성은 어사와 감사로 경상우도에서 활동할 때 경험한 것을 시로 많이 남겼는데, 모두 30여 수의 시를 남겼다.

아래 첫 번째 시의 중요한 의미는 저 운을 넣어서 이순신이 먼저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아래 두 번째 시의 중요한 의미는 제승당 현판에 이순신이 지은 시의 운을 따라 시를 지은 것인데, 100여 년 전 까지 서성이 지은 제승당 시에 운을 따서 지은 시가 여러 편 있는 것이다.

서성의 후손들이야 이순신이나 한산도에 관심이 없다고 쳐도 통영은 달라야 한다. 진해와 통영, 여수의 향토사학자들과 이순신연구자들의 연구와 학술회의 등을 통해 이순신과 한산도의 위상을 더 높이기를 바란다.

명량해전(鳴梁海戰) 현장에는 본관과 고향을 아는 장군을 단 한사람도 새기질 못했으며, 500억이나 들인 남해 이순신순국공원에도 노량해전(露粱海戰) 참전자는 단 한명도 안 새겼다. 향토사학자나 공무원, 이순신연구자들이 인물은 아무도 연구도 안했고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다.

경남도와 통영시는 한산도에 왔던 수많은 사람들에 관한 자료집을 만들고, 한산해전역사관(기념관)을 만들어야한다.

이름과 본관, 관직과 행력, 서로 간의 관계를 새겨야한다. 그러면 전국의 수많은 문중과 후손들이 휴일과 방학을 이용해 한산도를 방문할 것이고, 자연스레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할 것이다.

난중일기와 장계(狀啓)에는 사량(蛇梁)이란 지명이 20여 회나 기록돼 있다. 필자가 7년 전 통영시와 사량면사무소에 “난중일기에 나오는 사랑도 관련 자료를 정리해 선착장 등지에 안내판을 세우면 좋겠다”고 제안하자 “이순신 유적지가 너무 많아 그 까짓 거 다 못합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산해전 참전자 한명 모르고 통영관련 자료도 잘 모르는데 한산대첩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한산대첩축제에 이순신과 함께한 해전참전자 후손을 단 한번만이라도 초대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통영엔 한려수도를 조망할 수 있는 케이블카가 있다. 케이블카 탑승 장소나 전망대에 이순신과 함께한 주요 장군들과 군관들을 100명 또는 200명 정도 엄선해 안내판을 게시하면 좋겠다. 그렇게 해놓으면 전국의 각 문중이나 후손들이 대대로 단체나 가족여행을 와서 기념사진도 찍어갈 것이다. 만약에 기념비(명패)로 새겼다면 기념비를 탁본해갈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탁본을 해간다면 지켜보는 촌로들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흐를 장면이다. 장소야 케이블카뿐 아니라 제승당 가는 길, 유람선 선착장 주차장 등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한산해전 참전자나 6년간 한산도 통제영에 왕래한 수많은 사람들을 제대로 모른 채 치러지는 한산대첩축제는 재고돼야 한다. 어머니와 할머니 성함이나 고향도 모르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양반이라고 주장해봤자 잘못된 생각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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