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8일 송정택 사랑방 청년 19명…3.13 통영만세운동 결의
4차에 걸친 3천7백여 장꾼, 지식인, 학생, 기생 합심 ‘통영만세운동’

■ 3·1절 특별기획 105년 전 통영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00여 명의 충무교회 성도들이 ‘3.1절 100주년 그 날의 함성을 기억하며’ 행사를 진행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00여 명의 충무교회 성도들이 ‘3.1절 100주년 그 날의 함성을 기억하며’ 행사를 진행했다.
진평원의 격문 '동포에 격하노라!'

"철석같은 우리의 신념, 벽력같은 우리의 함성, 적의 창과 투구는 이미 땅에 떨어졌나니, 소양한 천지, 구십춘광 거칠 것, 막힐 것 없는 정의의 개선, 회천동지(回天動地)의 나팔이다. 강산을 뒤흔드는 함성, 아침 해 칠색영채에서 오려 온 韓(한) 나라 簇竿(족간), 이천만의 손으로 매어울리렴, 하늘 높이 靑天(청천)까지…나라 생각 외에 일절 구구한 욕심은 도적질이다. 우리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다오” <진평원의 동포에 격하노라! 중에서>

105년 전 순국선열들은 일제의 속박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강점기 그 힘든 터널을 건널 수 있었던 광복의 시발점은 1919년 3월 만세운동으로부터 출발했다.

통영의 만세운동은 지식인은 물론 장꾼과 학생, 여성과 기생 등이 합심해 4차에 걸친 3천700여 명이 참여, 뜨거운 만세운동으로 한국사에 기록되고 있다.

1919년 3월 8일 경성 배재고에 재학 중인 진평헌이 귀향했고, 3월 13일 장날을 기해 진평원, 권남선, 양재원 등 19명의 청년들이 거사를 결의했다.

3월 8일 밤 송정택 사랑방에 모인 이들은 3월 13일(음력 2월 12일) 장날에 남망산공원에서 거사할 것을 결의, 준비에 착수했다. 남망산 광부 450명과 도산면 광부 170명은 박봉삼, 서상호, 양재원, 김종원, 강세제 등이 인솔해 출동하기로 했다. 최천과 박중한 등은 시장 내 각 포목상인에게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하고, 기독교 신도들을 동원하기로 하는 등 각자 책임을 분담했다. 급한 것은 독립 선언문 인쇄와 태극기, 벽보 제작이었다.

3월 9일 김형기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상 나카무라 상점(中村商店)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할 미농지 2천매를 구입하고, 그날 밤 8시경 통영면서기 이학이와 강세제, 허장완 등이 통영면사무소의 등사판을 한 대 훔쳐내 비밀리에 산양면 사무소에 집결했다.

하지만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지 못하자 진평헌은 ‘동포에게 격하노라’라는 장문의 격문을 작성했고, 양재원, 배익조 등은 밤을 새워 1천여 매를 등사했다. 다른 사람들은 태극기 수 백 개를 만들고, 격문 중 일부를 수십 장 따로 써서 거리마다 붙였다.

격문을 등사한 미농지를 산 나카무라 상점 영수증. 통영문화원 복사소장본.
격문을 등사한 미농지를 산 나카무라 상점 영수증. 통영문화원 복사소장본.

그러나 일본인의 밀고로 10일 새벽 일본 경찰에 발각, 주모자 모두 체포, 투옥된다. 나카무라 상점에서 용지를 대량 구입한 영수증이 문제였다.

이 사건으로 일경에 붙들린 주모자들은 대구와 부산형무소에서 1년~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이들 가운데 이학이(당시 22세), 허장완(당시 21세) 등 세 열사가 옥중에서도 독립정신을 굽히지 않아, 심한 고문에 의해 옥사하거나 가석방돼 나와 숨졌다.

이학이 열사는 복역 중 고문당한 여독이 심해 가석방된 후 부산의 병원에서 사망, 부산의 최천택 등 청년들은 울분을 참지 못해 영구를 인수해 통영으로 운구했다. 상여가 김해에 이르자 김해 청년들은 영구를 진영까지 메어다 옮기고, 지방의 청년들이 릴레이식으로 통영까지 옮겼다. 지역민들은 통곡으로 맞이했다. 애도 속에 8일장을 치렀고, 장례 기간 곳곳에서 군중들이 만세를 불러 죽음 이후에도 민족혼을 일깨웠다.

허장완 열사는 부산 감옥에서 복역하다 마산 감옥으로 이감, 감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모진 고문을 당해 옥사했다. 허 열사의 영구가 객선에 실려 통영에 들어오던 날, 통영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의 주검을 눈물로 맞았다. 허 열사도 이학이 열사와 마찬가지로 8일장을 엄수했다.

또 고채주 열사는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중병으로 가석방, 통영면 도남리(현 도남동)에 돌아와 1920년 세월을 떠났다. 그는 40세의 나이로 하와이로 망명, 마카월린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1906년 교포들을 모아 자강회를 조직했고, 1908년에는 한인합성협회와 전 미주한인공립협회를 통합, 국민회를 창설하는 등 해외독립운동의 큰 기둥이었으며, 고향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통영시는 2012년부터 시민이 참여하는 행사로 전환, 매년 3·1절에 통영만세운동 기념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다.
통영시는 2012년부터 시민이 참여하는 행사로 전환, 매년 3·1절에 통영만세운동 기념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다.

남해 어업권 전진기지 ‘통영’ 일제 각종 수탈 반일감정 고조
3·1운동 기념비 원문공원 이설, 매년 통영만세운동 기념행사

통영 청년들의 만세의거 준비는 일제 경찰의 사전 검거로 실패로 끝났으나, 만세시위 예정일인 3월 13일 진명유치원 보모인 문복숙(文福淑)·김순이(金順伊)·양성숙(梁聖淑)이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이성철 형제의 만세운동(3월 18일), 관란재 학생들의 만세운동(3월 18일), 김상진의 격문첩부(3월 22일) 등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이 이어지다 4월 2일 통영 장날을 기해 3천700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된 당시 여성들의 독립만세 운동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된 당시 여성들의 독립만세 운동 모습.

특히 4월 2일 시위에는 예기조합의 기생 33명도 금비녀와 팔찌를 팔아 소복차림으로 시위대열에 동참했다는 감동적인 기록도 있다. 이들은 수건으로 허리를 동여매고 태극기를 들고 중앙시장 복판을 전진하며,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목이 터지도록 독립만세를 외쳤다.

통영에서 치열한 만세시위가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일제의 각종 수탈로 반일감정이 고조돼 있었기 때문이다. 남해 어업권의 전진기지였던 통영은 1899년부터 일본 어업민의 이주로 집단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수산자원과 조선인 어민을 수탈해 왔다.

통영의 시위는 대부분 장날을 이용했고, 통영 읍민과 인근 농어민들까지 동참하며 규모가 확대돼 당시 통영시민들의 독립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재 원문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3·1운동 기념비는 통영인으로서 3.1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희생을 당한 애국지사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1972년 9월 충무 시민의 이름으로 남망산 광장에 세웠다가 1991년 원문공원으로 이설, 지금에 이르고 있다.

통영시는 2012년부터 시민이 참여하는 행사로 전환, 매년 3·1절에 통영만세운동 기념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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