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년 전, 선조들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통영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8일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해 4차에 걸쳐 전개, 신분의 차별을 넘어 남녀노소가 함께 단합해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을 펼쳤다.

3월 8일 밤 송정택 사랑방에 모인 청년 19명은 3월 13일 장날에 남망산공원에서 거사할 것을 결의했다. 독립선언서를 등사할 미농지를 구입하고, 통영면사무소의 등사판을 한 대 훔쳐 비밀리에 산양면 사무소에 집결했다. 하지만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지 못하자 진평헌은 ‘동포(同胞)에 격(檄)하노라!!’ 격문을 작성하고, 다른 사람들은 태극기 수백 개를 만들었으며, 격문 일부를 써서 거리에 붙이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인의 밀고로 10일 새벽 일본 경찰에 발각, 주모자 모두 체포, 투옥된다. 이들은 6개월 이상 옥고를 치렀고, 옥사하거나 가석방 후 세상을 떠났다.

이후 3월 13일에는 유치원 보모 문복숙, 김순이, 양성숙 등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중앙시장에서 군중과 봉기했다. 시장에 모였던 군중들이 일제히 호응하며 통영은 만세 소리로 뒤덮였다. 4월 2일 통영에서의 만세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모두 4차례의 시위운동이 있었고, 서당 학생, 기생, 어민, 제조업자, 해외독립운동자 출신 등 3천명 이상이 참가했다.

만세운동은 대부분 장날을 이용했다. 통영 읍민과 인근 농어민들까지 동참, 시위 규모가 확대돼 당시 통영시민들의 독립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105년 전 통영의 시민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일제의 총칼에 맞서 숭고한 목숨을 희생하면서 민족의 혼과 얼을 지키며, 자주독립 의지와 불굴의 민족정신을 보였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는 선조들의 피·땀·눈물이 서려 있다. 대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외친 함성이 이어졌던 곳은 통영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역 경기침체, 저출산, 실업률 등 또 다른 문제와 직면하고 있다. 선열들의 드높은 기상과 대동단결의 ‘3·1독립운동의 정신’으로 힘과 지혜를 모아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대한독립만세’라는 여섯 글자에 담긴 선조들의 용기와 결연한 의지를 통영의 미래 발전을 위한 역량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1919년 3월 8일 밤, 23살의 통영 청년 진평헌과 독립운동가들이 밤새워 쓴 ‘동포에 격하노라’의 격문 끝에는 ‘우리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다오’라고 쓰여있다. 통영 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정신은 통영의 역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