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미발굴 시조 2편을 찾아내다.

 초정 김상옥의 연보〔《김상옥 시전집》〈 (주)창비, 2005. 10. 30.〉, pp651〕를 접한다. 출생지는 경남 통영읍 항남동 64번지이다.

 


 출생일은 1920년 5월 3일(음력 3월 15일) 이다.
 남달리 예술적 소양이 뛰어나 일찍이 적지 않은 이들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문학적 역량은 1928년(만 8세)에 동요「삐비」를 지었다.


 그리고 1934년(만 14세)엔 금융조합연합회 신문 공모전에 동시「제비」가 당선 된다.


 이 작품이 맨 처음으로 활자화 되었다 한다. 이어서 동시「연필」을 발표 한다. 이 외에도 12세 때 동시「꿈」을 통영보통학교 교지《여황의 여록》에 발표하였다 한다(역사학자 김재승씨 증언).


 하지만 자료 부재로 아직 원문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상이 초정의 어린 시절 문학에 관심을 가진 부분이다. 이는 당시 통영의 주변 환경의 덕으로 생각 된다.


 초정의 증언에 의하면 늘샘 卓相洙가《참새》지의 편집인이었다는 것과 眞山 李瓚根, 쇠뫼(鐵山) 金琪澤 등의 총애를 받은 적이 겨우 7곱살로 이때부터 詩에 눈뜨게 한 계기가 되었다 한다.


 항남동 67번지엔 늘샘 탁상수가 살았다. 초정은 바로 건너건너 집 64번지다. 항남동 55번지는 진산 이찬근의 한약방《수남의원》이었다. 유족의 증언에 의하면 진산 이찬근은 이곳에서 태어나 말년까지 살았다 한다. 안채에는 살림을 했고 아래채는 한약방을 운영했다.


 초정 김상옥은 이 한약방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다 한다. 이찬근 선생은 1923년 9월 24일 동아일보 통영 지국장에 임용되어 경영하였다.


  이때 늘샘 탁상수는 기자로 임용된다. 이후 최천 통영 지국장 시절엔 늘샘 탁상수가 다시 임용 된다.


 동아일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한 흔적이다. 동아일보는 1929년 말 송진우가 사장으로 취임한 후 4면에서 조·석간 8면 체제로 증면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어린이 작품〉또는〈어린이 문예〉란을 둔다.


 통영 출신 중 많은 이들이 1925년경부터 시 시조 동시 발표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동시 부문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통해 1926년 통영 강습회 등을 시작으로 하여 학생들이 적지 않게 작품을 투고 발표한다. 초정 김상옥도 이 시대 이후 시류에 편성 동시를 접한 것으로 생각 된다.


 현재까지 초정 김상옥의 최초 발표 활자화 된 작품을 동시「제비」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 보다 두해 앞서 시조 작품 2편이 발견 되었다.「別離之章」(조선일보, 1932.02.17)과「별을노래함」(조선일보, 1932.03.02)이 그것이다.


 본명을 쓰지 않고 호를 사용하였는데 초정草情이었다. 훗날 초정은 호를 초정草汀으로 그리고 초정草丁으로 바꾼다.


 이 호 초정草情은 초기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연보를 보면 1930-35년 사이 진산 이찬근, 완산 김지옥, 노제 장춘식에게 여러 분야에 걸쳐 사사를 받았다고 한다. 위 작품들은 이와 연관이 있다.


 진산 이찬근은 한의사로서 한시를 주로 썼고 훗날 시조를 써《참새》지에 적지 않게 발표했다. 단국대학교 임선묵 교수도 진산이 쓴 그 시절의 시조를 호평 했다.


 초정은 만 7세 때《참새》지를 접하고 시에 적지 않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했다.


 《참새》지는 자유시나 동시는 없고 한시는 있으나 시조가 온통 주류를 이룬다. 생전에 초정은 1930년부터 진산 이찬근에게 본격적 사사를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는 시조일 가능성이 크다. 진산은 시조를 잠깐(1926-27) 써 발표 했다.


 진산이 시조를 쓴 것은 늘샘 탁상수와의 긴밀한 인연 때문이다.


 늘샘 탁상수는 이 시기부터 끊임없이 동아일보 조선일보 지면에 작품을 발표한 단골 고객 이었다.


 요번 초정 김상옥의 조선일보 발표 시조 2편은 늘샘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 된다.


 어린 나이에 조선일보 지면을 제공받은 예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듬해 늘샘은 시조 춘신(조선일보, 1933.01.21)을 발표 한다. 진산 이찬근은 짧은 기간 많은 양의 시조를 남겼다.


 그러나 동시는 남기질 않았다. 늘샘 탁상수는 시 시조 동시 민요 등을 써서 남겼다.


 근래 자료를 발굴한 바에 의하면 늘샘 탁상수가 1928년경 통영공립 보통학교 교사를 지낸 흔적이 있다.


 이 시기 전후로 동아일보〈어린이 문예〉란에 10세 전반의 통영 학생들이 투고 게재된 경우가 있다.


 늘샘은 동시에도 끈끈한 관심을 가졌다. 여러 근거에 의해 초정은 일찍 동시와 시조를 접하고 썼다고 믿어진다. 그 결과물이 이번에 발굴된 두 작품이라 여긴다.


 본지에 두 편 중 한 편인「별을노래함」을 원문대로 게재 한다.


 나즉한 서녁들을 한나잘보라들제/ 서로 주고밧는 정이나 잇는듯이/ 유달리 明滅하는별하나 나를向해 쏘드라 ◇ 떨어지는 별을잡고 눈이딸녀 내리다가 그만! 山에 가리워 가든길을 말헛서라 그뒤에 흘러간線은 마음속에 그리다〔시조「별을노래함」(조선일보, 1932.03.02) 전문〕. 본 시조의 3행 2수 중 둘째 연의 기사 형식이 시조 형식과 다른 점은 신문사 편집과정에서의 오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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