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이다. 오월의 아침 해를 받은 바다는 황금 조각으로 비늘진다. 누구는 이를 윤슬이라 말한다. 잘게 부셔져 반짝이는 물결, 이는 보는 이의 마음을 환하게 하고 탄성 짓게 한다. 이런 출근길에는 마주치는 사람마다에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고 싶고 저 햇빛 닮은 환한 웃음으로 지나치고 싶다.

오래 전 북미의 마을길을 산책하다가 마주친 낯모를 사람의 “하이!”(Hi!)에 언뜻 놀란 적이 있다.

이 놀람은 처음 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서였고 이것이 가벼운 인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땐 서구사람들의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란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한 의아심이 컸기 때문이다.

나중 이들의 이런 인사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것이었기에 저 편견을 그때 즉시 지워버렸다. 당혹감은 오히려 내 나라에 돌아와서 갖게 되었다.

서울의 빌딩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몇 년 동안의 경험에서 얻은 저 당연한 인사로 “안녕하세요!”를 하기위해 눈을 맞추려는데 모두가 외면해버린다. 아니, 말을 붙이면 큰일이 날 것 같은 굳은 표정을 지어버린다.

그 순간의 어색하고 게면 적은 침묵을 뭐라고 표현하기도 어렵다. 지방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속도 다르지 않았다. 북미에서 경험한 엘리베이터 이용의 일반적인 관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들은 다른 사람이 먼저 타고 있고 뒤따라 타게 될 때는 반드시 “실례합니다.(Excuse me)"를 하고 탈 때나 내릴 때 어쩌다 다른 사람과 몸이 스치게 되면 또 반드시 하게 되는 소리가 ”미안합니다.(Sorry)"이다.

여기에 바로 돌아오는 말은 “천만에... (You're welcome)”다. 이 몸 스침과 닿음의 ”미안합니다.(Sorry)"는 엘리베이터 이용의 관습만이 아닌 어디서나 하게 되는 가벼운 양해의 반사작용 같은 행위였다.

기분 좋은 아침 출근길에 저들의 습성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거쳐 오며 IT의 세계 최강국인 지금에 이르면서 버르장머리와 예의가 없다던 저 북미 사람들보다도 못한 우리 일반의 공중예의를 보는 아쉬움 때문이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웃어른은 물론이고 낯선 어른을 만나면 “안녕하셨습니까!”로 인사를 하도록 보고 배우며 자랐고 또 그랬었다.

혹 너무 낯설어 피하듯이 지나치려면 “게 서거라, 왜 어른을 보고 인사도 않고 가느냐? 네 이름이 뭐고 뉘 집 아이냐?”고 꾸중을 들었고 이 또한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어른을 못 본척하고 이러다 봐도 안 본척하더니 어느 순간 동네 어른이 아이를 나무라는 것이 불필요한 것에서 도리어 지나친 것이 되어버렸다. 무관심을 넘어 기피하고 무시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지경에 이른 이러한 세태가 어디 나만의 관심사이겠나 싶다.

‘하지만 낙담하지 말자, 그리고 저 옛 모습도 포기하지 말자!’

집을 나서며 받아든 지인의 ‘지속 가능한 공동체’의 한 페이지를 보며 오늘 아침의 윤슬 같은 환함과 반짝임의 파장을 받기에 이리 기분 좋게 마음속으로 뇌인다.

오늘로 23번째 ‘지속 가능한 공동체’의 시도, 거리의 좌판 빵을 사면서 안부를 묻고 하나 더 사서 이웃 만나면 “이거 맛보실래요?”로 부담 없이 건네며 나눠먹고 주차장에서 만나는 아이와는 “예쁘다” 칭찬하며 “나는 몇 호에 사는 아줌만데 너는?”라고 인사하고, 휴지 박스 줍는 할머니께 집에 것 챙겨서 내어 드리며 안 보였던 동안의 안부를 물으니 환하게 돌아오는 응대, 이 모두를 우리가 보고 있으니까.

마침 앞의 차가 줄을 서서 우회전하는 내 앞으로 역시 오른 쪽 깜박이를 켜면서 끼워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좋아요, 나보다 바쁜가 봐요? 먼저 가세요.’ 양보를 하니 비상등 신호로 두 번을 깜박 깜박하고 간다. “땡큐!” 신호다.

‘지속 가능한 공동체’ 어렵지 않다. 이제라도 이처럼 편하고 쉬운 공동체 놀이 나도 따라 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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