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속의 1930년대는 일본 식민지 정략이 악랄한 계교로 강고해지던 시대이다. 이에 우리 민족의 구국적인 지사(志士)들은 가녀린 국운을 안고 임정(臨政) 둘레에 서성이며 자중지란이 겹치어 당시 각 분야별 활동은 점차 위축된 시대로 기색 혼절 기미였다.

시문학의 경우만 하드라도 동아·조선 양대 신문마저 폐간의 암운(暗雲)이 덮였고, 1백여 종류에 이르던 동인지 및 잡지조차 30종으로 국한되어지다가 30년대 말에 와서 급기야 모습을 살필 수 없는 암흑기 일보 직전이어서 긴 동면(冬眠)을 겪어야 하였다.”〔한춘섭, 「장응두론(張應斗論)」, 『時調와 批評』1989년 여름호 제1 권 2호, 시조와 비평사, 1989. 6. 10, 37쪽〕

이렇게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식민통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하여, 그 암흑기를 벗어나 자주독립을 이루는 1945년 8·15광복[八一五光復]때까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핍박과 압박을 견뎌내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문학의 전반적인 상황은 앞길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장응두의 시편들도 이와 영향이 깊어 보인다.

장응두는 1934년부터 1940년까지 각종 신문 잡지에 시조(양장시조 2편 포함) 발표작품이 적은 점은 그가 그 시절에 자유시 영역에도 상당히 관심을 가져 발표기회를 확장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의 발표작품이 1941년부터 해방이후 일정기간까지 발견되지 않는 점은 문학가로서의 양심선언인 절필의 과정을 밟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립할 수 있는데, 첫째는 자연으로부터 얻어진 소산물로서 시적 영역을 확보한 점이다.

둘째는 그 시대 만인이 겪었던 인생에 있어 수심과 적막, 인생무상(人生無常), 신세한탄 류가 나타난다.

셋째는 항일의식을 바탕으로 한 훌륭한 저항문학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통영이라는 통제영의 특수성에서 기인하여 민족의식이 싹튼 의지적인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장응두의 항일시 부분은 일찍이 발표한 바 있어 본 고(考)에서는 제외했다.

― 자연동화의 내용

구체적으로 시조 「갈매기」 「승경(勝景)」 「추정(秋情)」 「낙엽」 「관란(觀瀾)」의 작품이 해당된다.

장응두가 자연의 소재를 바탕으로 의식화해서 시의 생명력을 확장시킨 점은, 여러 시인들이 초기에 겪었던 문청시절의 습작기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보인다.

《三四文學》3집(1935.3.1.)에 발표된 시조작품 「갈매기」 「승경(勝景)」 「추정(秋情)」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극히 자연서정적인 소재가 등장하고 있다.

“탕탕(蕩蕩)한 물결”, “급급(急急)한 산세(山勢)”, 갈매기인 ‘백구(白鷗)’(「갈매기」)와 급한 ‘폭포(瀑布) ’, 가슴 속 닫는 ‘청풍(淸風)’(「승경(勝景)」)과 하늘 해맑은 데 ‘기러기’, 머리 흰 ‘갈대’, 바다 저편의 ‘돗대’를 통해 현실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동아일보 제 2회 시조모집(1939년) 1위 당선작 「낙엽」에서도 가을날 ‘낙엽’, ‘뫼ㅅ새’, ‘다람쥐’를 통해 “우리도 베옷 떨처입고 월동(過冬)차비 하랸다” 또는 골로 내린 ‘된바람’, ‘찬서리’, 물 위에 뜬 ‘가랑잎’의 시절에 생긋이 웃음 웃던 ‘야국(野菊)도’ 눈물 젖어 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 가서는 ‘노루’ 기는 밑에 ‘낙엽’이 부스럭거린다. “조심성 스런거름 하마 놀라 뛸가봐서/한밤에 절깐엣중이 홀로앉어 듣는다”는 것이다.

종장의 의미 깊은 표현으로 인하여 ‘낙엽’의 값진 의미는 두드러져 선(選)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이렇게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훌륭한 작품을 연이어 남긴다.

또한 조선일보 신춘문예 선외 가작(1938년) 「관란(觀瀾)」의 작품에서는 더 나은 자연 소재를 은유의 기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연에서는 “시퍼런 벽파(碧波)”는 “깨어져 백파(白波)”가 되고, 그 “백파(白波) 이는 곳”은 “옥을 뿌려 던”진 듯 하단다. 백파를 옥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구슬을 뽑는양하여 소리 더욱 맑”다는 것이다.

둘째 연에서는 이 백파가 “치고는 물러가고 물러갓다 다시치고/되감어 밀고들어 꼬리를 물고닷”아 “솨솨솨 뛰노는양이 귀도 코 또한 장”하다는 현상을 노래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부드처 깨어질제 깨지는양 아깝더니/깨어저 피어날제 꼬치저리 귀여우리/물방울 되나려안즈니 그것다시 아”깝다는 관전평의 극치를 더한다.

― 생의 수심과 신세 한탄

구체적으로 시조 「춘조(春調)」 「추야장(秋夜長)」 「객창추수(客窓秋愁)」 「탄세월(嘆歲月)」 「치심-생의 허무(馳心-生의 虛無)」 「무제음이수(無題吟二首)」 「그댄 울지 마시오」 작품이 관련된다.

장응두의 초기 시조가 자연동화에 몰입된 경우에 반해, 그 시대 그의 인생에 있어 마음의 수심과 적막이 깃든 시들이 나타나게 된다.

환안한 세상 뒤에도 ‘수심’은 “가슴깊이 들”고, 이 봄을 같이 즐길 이 없는 그 당시의 현실(「춘조(春調)」)을 나직이 들려주고 있고, 밤잠 이루지 못하고 ‘적막’에 휘말린 날(「추야장(秋夜長)」)의 시편에서 그의 시름을 접할 수 있다.

다음은 人生無常(인생무상)과 신세한탄 류이다.

“발길이 북망산(北邙山)에 멈으르니 석양(夕陽)인데/새소리 우아래로 골을하나 차고넘네/뜯이야 알길없어도 그저아니 들리”(「객창추수(客窓秋愁)」는 그날이다. 또한, 호남(湖南)의 객사(客舍)에서 쓴 시조에서는 “헐겊은 꿈결만두고 세월제만 가”고, 눈앞에 설레는 세월은 잡힐듯 먼 것을 깨닫는다. 신세한탄의 소리(「탄세월(嘆歲月)」)도 들린다.

시조 「치심-생의 허무(馳心-生의 虛無)」에서도 적막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무제음이수(無題吟二首)」에서는 그가 살아오는 현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거즛우슴 웃기란 울기보다 괴론것을/어중이 떠중이틈에 엉터리로 웃는우슴/부끄런 내마음을 넘어(超越)다시한번 우습네.” 하지만 “모도다 그대로두고 마음고쳐 살리라”고 고향에 있는 안석(安石)형에게 시조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장응두의 초기시에서부터 암울한 그 시대와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그댄 울지 마시오」에 가서 “허위고 달어온뜻을 ” “비맞어 늘어진옷을 그대뭇지 마시오”라 한다. 그리고 “먼길에 단인다하야 그대걱정 마시오” “뿌리고 가는소매를 그대잡지 마시” 라 답을 보낸다.

삶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을 당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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