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응두의 사회성을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가 생전에 교유한 문인들을 알아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 유명문학인과의 교유를 통해서 직·간접적으로, 그의 문학성의 본질을 확장했다는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먼저, 탁상수와의 교유가 되겠다. 이는 근자에 탁상수의 유족의 증언에 의해, 탁상수가 장응두에 관해 생전에 상당히 화두로 삼았음이 알려졌다. 반세기를 넘은 지금에 와서도 그 기억의 중심은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춘섭의 논문과 고두동 증언에 의해 구체적으로 알려진다. 특히 고두동의 증언에 의하면 탁상수가 장응두의 호 '하보'〈어디로 갈꺼나〉를 지어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외에도 발표작품에 있어 동질의 내용성이 있는 <음(吟)>자 형식의 제목, 서로 한 제목 하에서 장소를 옮겨가며 짓고 연시조로 발표한 점, 그리고 항일성의 작품성향들이 증명을 한다.

고두동과의 교유는 1960년대 부산에서 출발된다. 동향출신으로 끈이 이어져 오래갔다. 장응두가 고두동의 문학(시조)작품을 손질해 주었다는 후담이 쏠쏠하다.

유치환과의 교유는 널리 알려져 있다. 초기 『삼사문학(三四文學)』에서부터 시작되며, 다음은 『생리』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45년경 통영에서 서로 절친하게 지냈고, 훗날 부산에서까지 연분을 쌓았다. 유치환의 작고 후 장응두의 조시(弔詩)는 울림이 크다.

김상옥과의 교유는 서로 시지(詩誌) 『맥(    )』의 동인(同人), 동아일보(東亞日報)와 『문장(文章)』지(誌)에 당선(當選) 및 추천(推薦)으로, 신문사 및 공모전에 함께 동참 한 점 등이 있다. 이 외에도 항일성향으로 감옥에 같이 투옥되는 아픔도 겪는다.

작고 이전까지 장응두의 자유시 「진혼가(鎭魂歌)」를 가슴에 새겨 읊은 애절한 사연은 널리 알려져 전해진다.

정진업과의 교유는 근자에 새로 알려진 내용이다. 정진업은 장응두 보다 3년 연하이다.

정진업의 주요약력 중에 이런 내용이 발견된다. 정진업은 〈1939년 5월『문장』지에 단편소설 「카츄사에게」로 이태준의 추천을 받았다.

1940년 평양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잠시 다녔으며, 통영 협성상업학원(현 통영 동원고등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장응두는 1940년 4월 동(同)지에 시조 「한야보(寒夜譜)」가 추천 된다.

이 외에도 장응두 유족 증언에 의해 정진업이 통영과 인연을 맺었을 당시 서로의 왕래가 빈번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장응두는 통영에서도 유명한 기생집에 출입이 잦았을 때라고들 한다.

박노석과의 교유는 끈끈했다. 1960년엔 시인 박노석에 의해 반민주행위자 조사위원회 구성위원으로 잠시 활동한다. 그가 평생에 번듯한 직장생활을 했던 유일한 흔적이다. 장응두와 박노석과의 술자리는 평생 끊이질 않았다. 작고 후 『부산문학』5집에 발표한 박노석의 '애절(哀切)한 메아리'가 대변해 준다.

이석우와의 교유는 이석우는 1956년 2월 부산으로 전직한다. 그 시절부터 장응두가 작고할 때까지 서로 각별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하보 석우 쌍곡병전(何步 夕雨 雙曲屛展)'을 개최할 정도였다.

김기호(金琪鎬)와의 교유는 장응두와 서신 왕래가 빈번했으며, 살아가는 동안에 그 누구보다 심적으로 가까운 이가 장하보(張何步)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응두가 시집(詩集)의 서문평(序文評)을 할 정도로 관련성이 있다.

김용호와의 교유는 그의 시작품 '진혼(鎭魂)의 노래'에서 유사성이 있다. 그가 주간으로 있었던 『자유문학』지에 장응두의 시조 '파도(波濤)'(1959)가 발표 된다.

당시대 둘 다 현실을 직시하고 반골로 세상을 살은 강직한 문인이었다. 이 외에도 뚜렷한 자료는 없으나, 더러 전해오는 유명인과의 교유는 흔하다. 하지만 근거가 희박해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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