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섬에 가는 걸 좋아한다. 스스로 격려하거나 칭찬할 일이 있을 때 최고의 선물은 섬길 걷기다. 섬은 힐링이요, 배움이요, 꿈꾸기다. 이 땅의 온 역사가 되살아나 내게 말을 걸고, 미래 세상이 달려와 내 앞에서 춤을 춘다.

그럴 때마다 궁금해진다. 내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꿈꾸지 못하는 섬마을의 이야기들. 섬에 선 나는 늘 배고프다.

한산도 야소마을로 달려갔다. 한 달 동안 계속되는 <섬마을 엄마> 연극이 끝날 무렵에야 겨우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저녁 5시에 시작하니 꼼짝없이 하룻밤을 자야 했다. 이 또한 기쁜 일이었다.

"섬과 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사이를 지나, 당신의 선물 같은 인생 곁으로 갑니다." 글귀가 무대 전부였다. 펄럭이는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당신의 인생이 선물입니다." 배우들이 섬마을 어무이, 아부지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저거구나 싶었다. 한 편의 시 같기도 하고, 금언 같기도 한 저 말을 어찌 풀어낼까 궁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우들은 난장을 쳤고, 동네 주민들은 정자나무 아래 평상에 걸터앉아 손뼉을 쳤다. 폭염은 바다에 빠졌는지 소식 없고, 품이 너른 나무 아래에서 간만에 살맛 나는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육두문자가 쏟아졌고, 박수 소리와 뒤엉킨 웃음소리가 정적에 잠긴 마을을 뒤흔들었다.

먹고사는 일에 치어 자식이 어떻게 크는지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고, 노름과 여자에 미친 남편 덕에 가슴앓이했다. 텃세 부리는 아낙들과 싸우느라 몸이 고달픈 건 뒷전이었고,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남편, 동무, 자식 먼저 보내고 나니 다 늙어버려 돌아보면 눈물밖에 안 난다. 자식 걱정과 외로움은 약봉지처럼 곁을 떠나지 않는다.

치매 걸린 조모가 옛 섬을 찾아가는 길, 시간을 넘나드는 섬마을 이야기가 뱃고동처럼 뿡뿡 대었다. 사람들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밀려 나가는 이야기 마디마디, 뱃고동이 울리면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미운 사람도, 가슴 칠 일도 별일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섬마을 어무이들의 것이었다. 연극 놀이로 채록된 이야기는 극본이 되었고, 수많은 땀방울을 거쳐 다시 원래의 주인공들에게 선물 되었다.

내 이야기인지, 네 이야기인지, 젊은 처자가 나인지, 꼬부랑 할매가 나인지, 배우가 나인지, 내가 배우인지, 우리가 극단인지, 극단이 우리인지, 무대가 마을인지, 마을이 무대인지. 도대체 헷갈리고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럴수록 어깨가 들썩인다. 손바닥이 마주친다. 무릎이 파르르 떨린다.

"그래, 그랬지. 그땐 참 힘들었는데." "말이라꼬, 니캉 내캉 얼매나 힘들었노. 그 시절이 그랬따 마." "인자 와서 우짜겄노. 다 지난 일 아이가. 그래도 마 이만하이 다행이다." "맞따. 우리 열심히 잘 살았다. 그래 밉던 인간도 돌아보이 고마운 구석도 많았다 마."

연극이 끝나고서 소책자를 펼쳐보니, 박경리 선생의 시 [삶]의 한 구절이 반짝이고 있었다. 달지고 해뜨고/ 비오고 바람불고//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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