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파도, 사고 싶은 게 있어도, 늠름히 잘 참았던 통영의 한 소년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부모님이 학교에 오셔서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가는 모습에 부러움을 넘어 서럽기까지 했던 소년 박명용, 1936년 도천동에서 태어난 그 가난한 소년은 굳은 결심을 했다.

"반드시 사업가의 꿈을 키워 많은 돈을 벌어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 적어도 나처럼 부모 없는 설움이나 가난으로 인해 공부 못하는 학생은 없어야 한다" 그 다짐처럼 그는 성공했다.  

하지만 슬하 4남매를 키우는 동안 애들의 담임선생님을 잘 만나지 않았다. 때로는 건방진 것이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혹시나 또 다른 소년 박명용 같은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1974년 끼니도 어려운 노부부에게 쌀 1가마 기부로 시작된 이웃돕기는 45년간 지속, 순수 사재 기부만 이미 70억이 넘었다.

특히 "배고파 공부 못한다는 소리는 없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처럼 통영중고생 급식비로 매년 5천만원 기부는 물론 통영문화재단 설립 자금 5천만원 출연을 넘어 문화마당 조형물 '시간의 여울' 역시 박회장이 시민을 위해 희사한 것이다.

로타리와 새마을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봉사는 물론 한산대첩축제, 통영예술제와 학생예술제, 송천예술인상, 예총회관 기부 등 문화예술을 육성하기 위한 끝없는 행보는 팔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병석에 입원한 가운데서도 강력하게 추진했던 송천박명용예술장학재단. 그 이름처럼 예술장학재단은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봐도 드물어 통영교육청, 경남도교육청, 교육부까지 협의한 결과 탄생한 산물이다. 

그는 말한다. "어릴 적 배고픈 게 내 인생의 약이었다. 예향 통영1번지 그 맥을 잇는 인재 양성이야 말로 내 인생 최대의 큰 숙제였다. 57년 금융생활 끝에 설립하게 된 공익재단 송천박명용예술장학재단은 그 난제의 끝이 아니라 통영예술인재 양성의 시작이다"

송천 박명용 회장의 통영사랑과 예술사랑에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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