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주성은 바다에 면한 낮은 지대인데, 드나들기가 수월치 않다. 도로에서 30여 분 갈대숲을 해치고 들어가야 한다. 비라도 내린 날이면 개펄이 발목을 붙들어 길도 없는 풀숲 가운데서 허우적대기 십상이다. 동해바다 안개가 풀숲을 뒤덮은 새벽 시간, 새 떼 마냥 앞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안개 속을 걷는 길은 역사에 온몸을 맡기는 시간이다.

염주성에서 두만강 하구까지는 직선거리로 20km가 채 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중러 국경이 있고, 다시 조중 국경이 있다. 그만큼 두만강 하구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지리는 얽히고설킨 역사의 실타래 그대로다.

성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400m로 둥근 사각형에 가깝다. 성의 구성이 짜임새 있고, 자갈과 돌을 깐 포장도로가 발굴되어 계획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폭 5m의 성벽을 따라가면 동, 서, 남쪽에 문이 있고, 성벽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하기 위한 옹성과 치가 있다. 치는 성벽을 공격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만든 돌출부위를 말한다. 대표적인 고구려 성의 특징으로, 고구려의 정통성과 문화를 계승한 발해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염주성 인근의 크라스키노 연추마을에는 단지동맹비(斷指同盟碑)가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결사의 뜻을 담아 손가락을 잘랐던 장소를 기념하는 비이다. 그때 안중근 의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태어날 땐 따로였으나 죽을 땐 같이 하기로 뜻을 모았던 11명의 동지가 있었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고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였다.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비를 세웠는데, 관리 문제와 러시아 군사시설 보안 문제로 두 번에 걸쳐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지금은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회사 부지 안에 비석을 모셔두고 직접 관리하고 있어 한국인 참배도 수월하다.

단지동맹 이후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막후 기둥이었던 최재형 선생의 지원을 받아(제79화 통영청년단 이야기 2),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구한말부터 한인들이 집단 이주하여 국외 독립투쟁의 중심 기지이자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했던 연해주의 중심 도시였다. 이곳에 자리 잡은 신한촌에는 한때 16만 명이나 되는 한인이 거주하였고, 한국어 매체가 30여 종, 우리말 교육기관이 137개나 있었다.
거주 면적도 여의도의 3배에 달했다.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 이위종을 비롯하여 홍범도, 안중근, 유인석, 이동녕, 안창호, 박은식, 신채호, 최재형, 이동휘, 백순 등 기라성 같은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지사들이 이곳 신한촌을 중심으로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17일에 대한국민의회를 만들어 임시정부의 시초가 되었다. 뒤이어 생겨난 상해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와 통합의 길을 가게 된다.

하지만 1920년 4월 일본군이 러시아 백군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를 대대적으로 공격하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이 파괴된다. 이 '4월참변'을 통해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사살당하였다.(이야기는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저자 주. 사진은 새벽안개 속 단지동맹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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