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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수의 통영이야기 227 - 오횡묵사적비(吳宖默事蹟碑) 일기가 역사를 바꾸리니
   

원문고개에서 죽림으로 내려가는 도롯가에 비석이 하나 우뚝서 있다.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금은 비석이 깨졌던 아픈 기억을 드러낸다. 언제 어떻게 깨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안내표지판과 보호 줄만이 곁을 지킨다.

비석의 이름은 '통정대부행함안군수전별향사 오횡묵사적비'이다. 통제사 공덕비가 즐비한 통영에서도 독특한 이름이다. 오횡묵은 누구이고, 함안군수의 사적비가 왜 통영에 있는 것일까?
비석 곁의 안내판에서 간략한 내용을 알 수 있다.'1886년(고종 23년) 봄, 흉년과 역병이 극심했던 이 고장에 오횡묵이 영남별향사로 내려와 통제영 군창을 열고 별향미로 기근을 해소하고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등 백성들을 크게 구휼한 은공을 기리고자 1889년 7월 군민이 세운 사적비이다.'

동학혁명(1894년)이 일어나기 8년 전, 탐관오리의 수탈과 외세의 침탈이라는 이중 고통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기근과 역병까지 겹쳤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런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한 그를 향한 당시 통영백성들의 고마움을 헤아릴 수 있다.

이후 그는 함안군수, 고성부사, 정선군수, 자인현감, 공상소감동, 지도군수, 여수군수 등을 지냈다. 그는 기록의 달인이었다. 근무지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과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했던 일들을 일기체로 엮어 각기 총쇄록(叢鎖錄)이라 이름 붙였다.

그의 일기는 방대하고 치밀하여, 조선 말엽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도수군통제영지 복원은 그의 일기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 덕에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함안군수(1889~1893) 및 고성부사(1893~1894년)를 지내면서 통영을 여러 차례 순방하였으며, 통제영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역사는 기억과 해석이다. 일기는 가장 확실한 기억이다. 국가 공식 일기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세계유산으로서 인류 공동의 보물이다. 오횡묵 공의 일기 또한 우리에겐 보물이다. 그 속엔 당시의 세시풍속과 함께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다.

함안총쇄록에는 복날 보신탕 대신 팥죽을 나눠 먹었다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온다. 의외의 이야기다. 얼음과 함께 먹었다는 시구가 있는 거로 보아 지금의 팥빙수와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비슷한 시기 한양에 근무할 때는 개장국을 끓여 병사들에게 먹였다는 기록이 있어, 지역에 따라 풍속이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일기는 사람을 온전히 담아낸다. 그가 별향사로서 백성을 구휼한 것이 단지 나라의 명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음을 추정케 한다. 선물로 들어온 벌꿀과 딸기를 동헌의 아전과 사령은 물론 백성들과 감옥의 죄인들에게까지 나누었다. 들판에 나갈 때는 엽전이나 담배, 바늘을 넉넉하게 챙겼다. 민심이 천심이요, 민심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나온다는 걸 분명히 알고, 수령으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다했다.

그의 일기는 단순히 개인 취향에 따른 글쓰기가 아니었다. 세금을 징수하고,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부역을 탕감해주는 등 지방행정관으로서 필요한 모든 업무에 그의 총쇄록은 요긴한 자료이자 결과물이었다. 그의 일기는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고 윤택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큰 희망을 준다.

한산신문  hannew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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