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충무공은 난중일기에 진주성 전투에 대한 내용을 남겼다. 1592년 8월부터 1593년 2월 사이에는 일기 쓰기가 중단되어 있어, 1차 진주성 전투(1592.10)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지만 2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 소식은 1593년 6월 29일 자 일기에 등장한다.

"진양이 함락되어 황명보(황진), 최경회, 서례원, 김천일, 이종인, 김준민이 전사했다고 한다" "저녁에 진주에서 피살된 장병들의 명부를 광양 현감이 보내왔는데, 이를 보니 비참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7월 19일)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진주성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이 충무공은 근심하는 마음을 일기에 남겼다. 진주성이 무너지면 전라도는 적의 수중에 떨어지기 쉽다. 여수의 전라좌수영도 안전하지 않다.

2차 전투에서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호남진격을 포기하고 도로 부산 쪽으로 후퇴한다. 다행이었다. 전투에 앞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특별명령서에서, 진주를 반드시 함락하고, 곧바로 호남으로 진군하여 성을 쌓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왜 호남으로 진격하지 않고 후퇴했을까?

너무 많은 병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왜군은 조선에 주둔해 있던 12만가량의 병력 중 93,000명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략했다. 그중 40%에 해당하는 38,000명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성을 함락했을망정 왜군이 이겼다고 보기 어려운 전투였다.

진주성 안에서는 5,800명의 결사대가 항전했다.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사망하거나 자결했다. 도요토미의 지시대로, 성안에 있던 백성 6만여 명도 모두 학살당했다.

2차 전투가 시작되기 전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 휘하의 군사 3,000명이 지키고 있었다.

왜군의 총공격 소식이 알려지자 2,800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인근 경상우도는 물론이요, 전라도에서 대거 몰려왔다. 심지어 충청도 태안에서 온 의병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앙군의 지원은 없었다. 오히려 전라병사 선거이 장군은 순찰사 권율의 명에 의해 진주성에 주둔해 있던 자신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중앙군의 철수는 '전시작전권'을 갖고 있던 명나라군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다. 진주성을 공격할 테니 성을 비워줄 것을 미리 명군에 통보한 도요토미의 작전은 주효했다. 명군과 조선 중앙군의 발을 묶어 손쉽게 진주성을 함락하여 1차 진주성전투 패배의 치욕을 씻고, 경상도와 전라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려는 전략이었다.

조선 조정은 성을 비우자는 공성파(空城派)와 끝까지 지키자는 수성파(守城派)로 갈렸다. 선조와 의병장들의 수성론은 권율을 비롯한 군부의 공성론을 이기지 못했다. 그만큼 '전시작전권'의 위세는 강했다. 반대로 명군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의병들의 기세는 드높았다.

그렇게 해서 명나라 원군과 조선 중앙군으로부터 버림받은 진주성에선 5,800의 관군과 의병들, 6만의 백성들이 외로운 전투를 치렀다. 9박 10일간 계속된 전투는 7년 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애당초 질 수밖에 없는 전투였지만, 성안의 전의는 뜨거웠고 스물네 번의 전투에서 죽어 나간 건 왜군이었다. 6월 29일 마지막 25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왜군들은 집요하게 셩벽 돌을 뽑아내었다. 임진년 한 해 전 급하게 성을 확장하면서 부실하게 쌓았던 동문 성벽이 무너졌다. 왜군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그날 진주성을 지키던 관군과 의병, 백성들은 모두 혼불로 사라졌다.

저자 주. 사진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7만여명의 민관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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