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자욱한 새벽, 남망산에는 인적이 없었다. 안개 너머 강구안과 중앙시장 쪽에서는 뿌연 불빛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안개에 뒤섞여 흔들렸다. 어느 고장 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통영의 아침은 그날도 분주했다.

짙은 안개에 잠긴 남망산 정상,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에서 묵직한 움직임이 일었다. 천천히 일어나는 물체는 동상의 한 부분인 듯, 안개의 한 부분인 듯 자연스러웠다. 동충 끝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에 그림자는 좌우로 흔들렸다.

장군을 올려다보는 눈길은 깊고 조용했다. 항구를 가득 메운 안개가 마치 그 눈 속에서 뿜어져 나온 듯 눈빛은 뿌옜다. 눈썹에 매달린 작은 물방울이 흔들렸다. 안개보다 느리게 입술이 달싹였다. 머리카락도 얼굴도 어깨도 신발도 모두 젖었다. 청년이 가는 곳이 어디든 그에게서는 언제나 새벽안개 냄새가 날 듯했다. 갯비린내가 날 듯했다.

그렇게 청년은 통영을 떠났고, 통영을 꿈꾸었고, 통영을 사랑하였다.

통영에 태를 묻은 청년들은 떠나온 고향을 잊지 못했다. 비릿한 바다의 맛을 잊지 못했고, 원문 고개를 넘어설 때 출렁이던 가슴 속 파도를 잊지 못했다. 그 가운데 성성한 모습으로 낙인처럼 가슴에 새겨진 형상은 여황산과 미륵산과 남망산이었다. 강구안 시내와 앞바다를 내려다보는 남망산 정상의 이순신 장군은 출향 인의 가슴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준점이었다.

통영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치 강구에 떠 있는 섬처럼 그늘을 드리우는 남망산을 매일같이 올려다보며 지냈다. 이따금 언덕에 올라 영남에서 명성을 떨친 빼어난 해안 풍광을 넋 놓고 내려다보았다. 가슴 속 상념들은 이미 흔적이 없었다. 이 언덕에서 듣는 뱃고동은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다.

남망산은 통영의 안산(安山)이다. 주산(主山) 여황산과 조산(朝山) 미륵산이 자웅을 겨루듯 마주 선 가운데, 통영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보듬어 안아주었다. 고향을 떠나가는 젊은이들이 소리소문없이 침묵으로 찾았던 곳이다. 객지에서 돌아오는 중늙은이도 자연스레 찾는 곳이었다. 충렬사도 세병관도 착량묘도 제승당도 찾아가야 하지만, 남망산에 올라 낯익은 풍경을 휘 둘러보고 나서야, 뱃고동 소리를 듣고서야 고향에 돌아온 실감이 들었다.

세월은 흐르고, 세태가 바뀌고 인심도 변하고 나니 남망산은 기억 저편으로 묻혔다. 도서관이 떠나가고, 기상대가 떠나가고, 시민문화회관이 들어섰다. 아이는 중년이 되었고, 중년은 노년이 되었고, 노년은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비록 남망산을 찾는 발걸음은 뜸해졌지만, 이곳에 묻힌 젊은 추억은 결코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삶의 뿌리가 되었다. 어느 누가 제 삶의 뿌리에 쇠말뚝을 박고 철조망을 두르고 객지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도, 지키는 이들에게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들에게도, 스스로 찾아와 지킴이가 된 이들에게도 남망산은 영원한 안산(安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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