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에서 이순신 장군께 예를 갖춘 연암의 발길은 한산도로 이어졌다. 치제에 참여한 이들을 위해 통제사가 특별히 배를 내어주었다.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보던 그 물길, 배는 맑고 고요한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열하로 가는 길, 연암은 심양에 들렀다. 심양은 병자호란 때 청군의 집결지이자, 50만 조선인이 끌려간 통곡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연암은 길게길게 속울음을 울었다.

한산대첩의 그 바다, 흔들림 없는 배 위에서 연암은 속이 심하게 울렁임을 느꼈다. 고통은 같았다. 조선 백성의 피 울음이나 왜군의 비명이나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해 질 녘 환호작약하던 조선 수군들의 눈물 어린 기쁨 또한 고통이었다.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 해영(海營)은 그날 이후 쑥대밭이 되었다가, 영조의 명에 의해 조경 통제사 때 제승당만 조촐하게 복원되었다. 적막했다. 옛 병영의 흔적은 이미 찾을 길 없고, 빈 작전회의실만 동그마니 위대한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뱃길, 뱃머리에 서서 둘도 없이 빼어난 풍광에 넋을 놓고 있었다. 안내를 맡았던 장수 한 명이 다가와, 이 바다엔 섬이 셀 수 없이 많아 이 섬 저 섬 다 들러본 이가 없다 한다. 고려 때부터 시행된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인해 섬에는 사람이 살 수 없었기에, 섬에 대해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만나고 새 문물 만나기를 출세하기보다 더 중히 여기는 연암이기에, 부둣가를 맴돌며, 시장통을 맴돌며, 병영과 공방 곳곳에서 부지런히 귀동냥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통영은 과연 대단했다. 사람보다 물산이 더 넘쳐났다. 터가 좁아 깃들어 사는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명성에 걸맞은 한강 이남 최고의 고장이었다. 관찰사보다 더 많은 권세를 가진 통제사와 휘하의 장졸들만으로도 기세가 등등했다.

수군에 필요한 전선과 각종 무기를 만드는 군수산업, 조선 최고의 장인들이 솜씨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방들, 팔도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진귀한 해산물을 걷어 올리는 어부들, 여기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물산들은 연암의 눈을 휘어잡았다.

연암은 붓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열하에 다녀온 이후로 이렇게 그의 붓을 떨리게 만든 곳은 없었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통영에 머물면서 온갖 것을 보고 듣고 사유하며 적은 글이 책 한 권이 넘을 지경이었다. 제례에 참여차 온 여정이었기에 마냥 머무를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여장을 꾸리기 전에 연암은 스스로 쓴 글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마지막 소회를 적었다. 이 고장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하지만 당장 이곳 사람들과 글을 나눌 생각은 없었다. 임금이 문체반정을 일으켜 자신과 자신의 글을 핍박했듯이, 이곳 통제사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인물은 못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후대 사람들이 자신이 남긴 문집을 통해 이 글을 접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갸웃거리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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