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룡 시인, 시민기자

지난 추석 전날 저녁에 KBS2 TV가 기획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를 보면서 나는, 내가 시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것은 가수 나훈아가 평양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는 것과 시인이라는 고은이 김대중 정부 때 초대받아 평양에 가서 한 행동이 달라도 너무나 다르게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나훈아의 평양 초청 거절 사유는 참으로 예술인이 지녀야 할 자유인의 초상과 헌걸찬 대장부다움에 그저 놀랍고 놀랍기만 하였다. 만약 나를 초대했더라면 나는 과연 어떻게 하였을까 생각하니 더 더욱 그랬다.

고은 시인이 북한에 간 그 당시를 회상할 때 내 기억이 맞다면, 시인 고은이 남북 정상들과 고위층 인사들 앞에서 만면에 득의의 웃음을 화안히 띄고 건배제의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상기된 표정에 술잔을 높이 들고 건배사를 하던 그 모습이.

나훈아가 TV에서 평양행을 거절했던 사유는 시키는 대로, 각본에 짜여진 대로 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저 고분고분 말잘 듣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거절했다고 했다. 진정한 예술가의 자유의 정신이 이럴진대 한때, 노벨문학상의 우리나라 제1의 수상후보자라고 노벨문학상이 발표될 즈음마다 국내 각 언론사에서 거론되던 고은 시인이 가수 나훈아보다 더한 자유의 정신을 구가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기에 나훈아가 더 돋보였던 것이다.

나는 고은 시인의 그러한 행동에서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떠 올리게 된다. ‘토니오 크뢰거’는 고독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숙명과 문학인이 지녀야 할 정신적인 자세를 이렇게 깨우쳐 준다. ‘고독과 소외가 영혼의 함양과 지성의 수련에 얼마나 큰 축복이고 복음일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자 친구’라고. 자신의 예술가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상인들과 같이 생활해서는 안 되고 항상 아웃사이더로서 관찰해야 하며, 언제나 고독이란 짐을 지고 뒷전에서 창조해야만 한다는 것이 ‘토니오 크뢰거’의 주요스토리다.

그러니까, 고독과 외로움, 가난이나 고통을 시인은, 문학인은, 예술인은 숙명처럼 안거나 달고 가야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의 평가 기준에서 보면 시인이란 별 볼일 없는 것인데, 반면에 그런 환경 속에서 시를 짓고 지은 시를 퇴고하고 또 퇴고하여 마침내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시 한편을 얻었을 때의 기쁨이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고 천상의 것이 아니던가!

나훈아는 정부에서 주는 훈장을 거부했다고 했다. 노랫말을 쓰고 곡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사람은 훈장의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고 더러는 술주정도 하고 영혼이 자유로워야 된다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나훈아의 그런 자유의 정신을 접하면서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를 생각했다. ‘나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고 부르짖던 영혼의 자유인 그 조르바를.

나훈아는 조르바보다 더한 조르바였다. 훈장을 거부한 일례 중에 초정 김상옥 시인의 거절도 나훈아 못지않다. 1995년 정부에서 초정에게 수여하겠다는 ‘문화훈장 보관장’을 훈격이 맞지 않다고 거절했다. ‘친일파도 받는 훈장을 받아 무얼 하겠나.’고 하는 것이 초정의 생각이었다. 육당 최남선의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육당은 이미 친일문학인으로 낙인이 찍혀있었기에 친일문학가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을 수 없다며 초정은 수상을 거절했다. “친일파가 만든 그런 상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한 초정의 일화는 시인의 기개와 정신이 어떠해야함을 잘 보여준다.

나는 또 나훈아가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연회에 참석토록 초청을 받았으나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공연을 한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당장 표를 끊어라.”라고 한 나훈아 예술혼의 그 기백과 용기, 자긍심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오늘날 정부지원금에 빨대를 꼽고 기생하며 살아가는 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을 생각하면서 이번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토니오 크뢰거’를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해준 고마운 콘서트였다.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