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해룡

거류산 정상에 올라 동쪽 바다를 바라보면 마을 전체는 보이지 않으나 당동만 바다 맨 오른쪽 끄트머리 그 언저리에 1592년 5월 8일 이순신 장군이 승리를 거둔 적진포해전의 현장이 보일 듯 말 듯 숨어 있다. 그곳은 어디일까?

당동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의 풍광은 산과 바다가 잘 어우러진 한 폭의 목가적인 그림으로 다가온다. 이곳에 눌러앉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마을의 초입에 다다르면 새로 글씨로 ‘화당마을’이라고 쓴 큰 바위가 이곳부터 화당마을임을 알려 준다.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거주민들이 마을을 나고 들면서 치병과 무병장수를 빌고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합장했을 서낭당의 돌탑 2기와 함께 서낭신의 대상이었던 팽나무도 반갑게 맞아 줄 것이다.

팽나무 아래에는 이끼가 끼어 본래의 색이 바랜 비석 3기가 서 있다. ‘행별장김공진국선정비行別將金公鎭國善政碑’, ‘선락장군행별장황공응식宣洛將軍行別將黃公應植’, ‘절충장군행별장折衝將軍行別將’ 등으로 유심히 읽어보지 않으면 무슨 글자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퇴색되었으나 찬찬히 읽어보면 이곳이 예전 남촌진南村鎭 터였음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이들 비석은 이곳 남촌진에서 근무를 했던 별장들이 선정을 베풀고 임지를 떠나갈 때 주민들이 감사한 마음을 모아 그들의 행적을 새긴 비문임을 알 수 있다. 별장이란 산성이나 나루, 포구, 보루, 섬 등을 지키는 종9품의 무관 벼슬로 이들 별장의 행적을 새긴 비석은 그 주변이나 근방 어딘가에 별장이 근무했던 진(鎭) 터가 분명 있었기에 빗돌을 세웠을 것이다.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를 예전에는 남촌이라 불렀다. 별장이 근무했던 진터는 바로 남촌진이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의 신룡리나 당동리를 포함하여 그 일대 인근 동해면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들은 화당리란 지명 이전에 그곳을 남촌으로 불러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남읍지에도 남촌에 장이 세 번 서는데 8일과 18일, 28일에 개시한다고 기록돼 있고 한때 인근 동해면 주민들이 남촌장에 장을 보러 배를 타고 가다가 조난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인근 당동에도 3일, 13일, 23일 장이 섰으며 지금은 남촌장을 흡수하여 3일과 8일 등 5일장이 당동에 선다.

그렇다면 그곳 화당리를 왜 남촌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옛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고성조에서 이를 고증해 주고 있다.

“광해6년(1614)에 현의 남쪽 도선(道善 지금의 통영시 도산면 가오치)에 남촌진을 처음 설치하였다가 광해11년(1619)기미년에 현의 동쪽 적진포(積珍浦)에 남촌진을 이설하여 이로 말미암아 남촌(南村)이라 일컬었으며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고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남촌진을 적진포로 옮겠으나 적진포라 부르지 않고 남촌진이라 했다는 것이 바로 문헌의 고증이다.

또한 심봉근 전 동아대총장과 남촌의 지표조사를 했을 때(2013년12월)진터와 토성을 비롯하여 군선의 수리를 했던 굴항터의 흔적이 상당 부분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젊은 시절 이곳에서 마을 이장을 지냈고 지금은 부산 수정동에서 조그마한 사찰의 주지로 있는 지산스님도 함께 지표조사를 하면서 지금의 화당리 마을 전체가 남촌진이었고 서낭당이 있는 그 주변으로 민가가 있었다는 것을 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었다며 전해주었다. “내가 젊었을 때 새마을사업을 했어. 그때 마을 길을 넓히면서 길 주변에 서 있던 남촌진과 관련된 빗돌이 방해가 되어 모조리 빼어다가 길에 묻었어. 시방 묻었던 그 자리를 파보면 상당한 빗돌이 나올 게야. 지금 서낭당 터에 있는 빗돌 3개도 당시 마을에 있던 것을 내가 그곳으로 옮겨다 놓은 거야.”라고 술회했다.

그렇다. 적진포해전이 일어난 적진포는 바로 남촌진이었던 거류면 화당리였다. 혹자는 ‘영남호남연해형편도嶺南湖南沿海形便圖’에 나오는 ‘용수100척기동풍容數百隻忌東風’이란 고지도에 적힌 문구에 착안하여 당동을 적진포라고 주장을 하나 그것은 이곳 지역의 지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당동은 바다 밑이 육지로부터 완만한 경사구조로 돼 있어 배를 접안 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지금도 방파제가 바다 쪽으로 길게 뻗지 않았다면 배를 육지 가깝게 접안 할 수 없는 것이 그 사유다.

임진왜란 당시 오늘날처럼 방파제시설이 있었다면 또 모를까 썰물 때 수심이 얕아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당동보다 화당리 포구는 수심이 깊어 배의 접안이 용이해 군진을 설치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용수 100척’은 U자형의 오른쪽 끝부분에 해당하는 적진포인 화당리에서 옴팍하게 들어간 당동만에 배 100척을 정박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앞으로 고성군에서는 당항포해전만 기릴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적진포해전도 함께 기리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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