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아랍 사람들이 무역하면서 우리나라에 오간 역사는 길고 길다. 많은 무슬림들이 아예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았다. 페르시아의 기록을 통해 우리나라에 살고자 했던 무슬림들의 꿈을 만날 수 있다. "신라에 진출한 무슬림들은 자연환경의 쾌적함 때문에 영구 정착해 떠날 줄을 모른다"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아비틴과 신라 공주의 아들 페리둔 왕자는 1500년의 한-이슬람 교류의 역사를 열어젖힌 장본인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청해진이 철폐되고 30여 년이 지난 876년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난다. 해운 최치원 선생이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쓴 것이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이다. 산둥반도에서 시작된 약탈과 살육은 중국의 동남부 해안을 휩쓸고 내려간다. 당나라 5대 항구도시에서 무슬림 공동체 번방을 이루고 살던 이들이 내륙과 해상으로 피신했다. 내륙으로 피신한 이들은 후에 신장자치구 등에서 사는 회족의 조상이 된다.

해상으로 탈출한 이들 중에는 오랫동안 교류해왔던 신라로, 유토피아로 생각했던 신라로, 거리도 가까웠던 신라로 이주한 이들이 많았다. 바로 황소의 난이 종결되는 879년에 처용이 울산 앞바다로 들어온 사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움푹 들어간 눈, 우뚝한 코를 가진 처용은 이슬람 사람이었다.

시인 김춘수는 처용을 노래했다. 비록 역사 속 처용을 노래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 만으로도 한려수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처용은 울산 바닷가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처용과 닿아있다.

처용설화는 삼국유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1천100여 년 전 신라 헌강왕 때 울산 앞바다에서 용왕과 함께 나타난 일곱 아들의 한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교적 정사(正史)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삼국사기도 처용을 기록하고 있다.

민속학적으로는 처용이 춤과 노래로 역신을 쫓는 주술가로서 신라의 역병 퇴치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해석한다. 처용이 울산 지역 화랑 계통의 주술집단 사람이었으리라는 얘기다. 정교일치 사회였던 신라 초기, 임금은 차차웅이라 불리었고 그 이름이 처용으로 변형됐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서 처용이 물리친 역신(疫神)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역병(疫病), 즉 감염병이다. 손님, 마마, 두창이라 불리는 천연두가 최악의 역병이었다. 당나라의 수십만 군대까지 개입한 7세기의 삼국 전쟁은 감염병을 실어날랐다. 9세기 들어서는 국제무역이 활발해지며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잦아졌고, 역병은 동아시아를 감염병 공동체로 만들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페르시아의 의술이 비록 백신이나 치료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천연두를 억제하고 진정하는 데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페르시아의 의술은 매우 뛰어났다. 세계를 누비며 국제 무역을 하던 상인들이 다양한 치료법과 약재를 이용해 앞선 치료 능력을 갖췄을 수 있다.

춤과 노래로 역병을 물리쳤든, 선진 의학 지식과 약재로 감염병을 치료했든, 처용은 신라 K 방역의 중심인 '질병관리본부'이자, 백신 접종 증명서였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지난 7월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했다. 1964년 UNCTAD 설립 이래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이제 우리나라는 백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문화강국'이 되어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 그때 이슬람은 우리의 오래된 새 벗으로서 인류 공영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아이가 바다를 건너가게 하려면,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는 대신 바다를 꿈꾸게 하라" 통영 바다 이야기와 처용과 아비틴과 페리둔의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이 꿈꾸며 뛰노는 놀이터이자, 미래로 가는 바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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