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윤슬은 남다르다. 여수와 다르고 제주와 다르고 부산과도 다르다. 겪어본 이들은 안다. 선호하는 것이야 제각각이겠지만, 통영을 사랑하는 이들은 통영 윤슬을 최고로 친다. 물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는 없다. 아름다움에는 절대적 기준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통영을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는 윤슬의 인이 박여 있다. 스스로 알든 모르든. 윤슬이 주는 아름다움 너머의 그 무엇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혼을 흔들어댄다.

불가(佛家)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을 깨달아 아는 부처의 지혜를 해인(海印)이라 한다. 모든 법을 비추어 보는 것이 바다에 만상(萬像)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비유인데, 이 만 가지 형상이 바로 윤슬 아니겠는가? 그러니 윤슬을 온 가슴으로 품고 사는 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겠다.

윤슬은 그냥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온몸으로 겪는 것이다. 그러니 "통영 윤슬을 본 적 있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겪어본 적 있냐?"고 물어야 한다. 통영 윤슬은, 설레는 반짝임을 눈으로 보고, 자글자글하는 소리를 귀로 듣고, 톡톡 터지는 갯맛을 혀로 느끼고, 몽글거리는 느낌을 살갗으로 느끼고, 찰라 생의 비린 냄새를 맡아야 한다. 그렇게 윤슬을 온전히 겪어본 다음에야, 윤슬을 겪어보지 못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가게 된다.

통영 윤슬이 왜 유달리 아름다운지, 누군가 과학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으리라. 다만 몇 갈래로 추측해본다. 윤슬의 3요소는 햇빛과 바람과 물이다. 통영의 햇살은 맑다. 통영의 바람도 알맞다. 통영의 물도 안성맞춤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화로움의 꽃이 윤슬이다.

숨겨진 제4의 요소인 섬과 뭍의 역할도 크다. 정확히는 섬과 뭍과 바다의 관계다. 열린 듯 닫힌 바다, 닫힌 듯 열린 바다. 끊어진 듯 이어진 섬, 이어진 듯 끊어진 섬.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햇빛과 바람과 물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가에 따라, 어떻게 물결 지는가에 따라 윤슬의 씨알이 달아진다. 명도와 채도와 질감이 공명한다.

홍도, 국도, 갈도를 스치며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한 파도는 욕지, 매물을 지나 한산 앞바다에 이를 즈음 그르렁대던 야수의 발톱을 내려놓고 순한 파도가 된다. 그렇다고 파도가 죽어 없어지지는 않는다. 모래알이 되고, 갯바위가 되고, 소나무가 된다. 씨알 굵은 고기의 날렵한 몸짓이 되고, 우윳빛 조갯살이 된다. 파도와 함께 달려온 바람의 온도가 올라간다.

몸이 달뜬 바람이 바닷물 표면을 힘있게, 그러나 부드럽게 밀어댄다. 바위에 부딪혀 되돌아 나온 물결과 뒤섞인다. 드는 물과 나는 물이 한 몸이 되어 바다가 고요해진다. 쉼 없이 움직이는 파도의 움직임(動)이 멈추어 명징한 고요(靜)가 된다. 정 가운데 동이 있고, 동이 정의 모습을 띤다. 정은 동의 기운을 삼키어 무위(無爲)의 긴장을 품었다. 순진무구(純眞無垢)의 세계다. 할 일 없는 노인과 바쁘디 바쁜 아이의 하나 됨이다.

윤슬이 피어나고 부서지는 순간이면, 누구라도 갯가에 나앉아 윤슬에 저마다의 삶을 비벼댄다. 그 순간 비늘이 떨어져 나온다. 윤슬의 것도 아닌, 내 것도 아닌. 차르랑 차르랑 비늘 쏟아지는 소리에 놀라 갈매기들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통영은 '바다의 땅'이 아니라 '윤슬의 바다'다.

저자 주. 윤슬 사진을 제공해주신 리얼라이즈협동조합의 정지훈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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