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당에 작은 예를 올린다. 장군의 위력과 신통함에 기대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성을 다해 공동체의 안녕을 빌었던 옛사람들의 간절함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녕이 내 안녕의 바탕임을 믿기 때문이다. 발길을 돌려 바다를 향해 산길을 내려간다.

에럼바우길은 여기서부터가 난 코스다. 줄 하나 잡고 바윗길을 내려와서, 벼랑길을 따라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부엉이 굴을 만난다. 밤이면 부엉이가 들앉아 부엉부엉 할 것 같은데, 앙증맞은 꽃들이 한가롭다. 멧돼지와 낚시객들만 찾는다는 외진 길을 따라가면 너럭바위들을 지나고 구당포성터를 만난다.

원래 당포성은 지금의 삼덕항 뒤쪽 언덕이 아닌 에럼바우길 쪽에 있었다. 삼덕항에서 마주 보이는 언덕 방향이다. 하지만 이곳엔 물이 부족하여 수군들이 머무르기에 부적합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걷다 보면 성벽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망루의 배수구와 북문 터도 확인되었다. 사람의 발길이 드물고, 개발 압력도 없기에 성터의 흔적은 오래도록 유지되지 않을까 싶다.

바다 쪽으로 더 내려가다 보면 버려진 해안 초소가 나온다. 규모가 꽤 크다. 그 아래쪽 바위가 에럼바우라고 하는데, 낭떠러지라 갈 수는 없다. 초소를 한참 지나 바다로 내려서면 소도방 바위가 나온다. 소도방은 솥뚜껑의 사투리다. 드센 파도에 깎인 바위가 기묘한 형상으로 파여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소도방 바위를 끝으로 편안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구당포성 성벽을 지나 삼덕조선소에 닿는다. 한번 시작된 길은 언젠가 끝을 만난다. 끝은 허무하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다. 길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작이 끝이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길은 시작된 곳에서 끝나기 마련이다. 역사의 끝 또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출발했던 원항마을 입구로 돌아왔다. 원항마을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무슨 역사일까? 유럽 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작은 도시 통영에 대한민국 최초가 참 많다. "최초의 서양 도래인 주앙 멘데스". 원항마을 앞에 있는 큰 비석 글이다. 사연은 이렇다.

임란이 끝나고 통제영 공사가 한창이던 1604년 6월 4일 제6대 이경준 통제사 때 일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캄보디아왕국에 파견했던 외교무역선이 일본 나가사키 항으로 돌아가다가 풍랑에 길을 잃고 통영 앞바다로 들어왔다. 조선 수군은 평화적인 투항을 요청했으나 끝까지 저항하여 이틀간 치열한 전투 끝에 격침했다. 이때 생포된 사람 중에 일본인과 중국인 외에 포르투갈 무역상이었던 주앙 멘데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은, 요즘으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에 해당하는 비변사 기록인 '등록유초'에 등장한다. 당시 해전 상황을 담은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가 전하는데,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의 이름과 함께 통제영의 무장 상황을 알 수 있다. 주앙 멘데스라는 이름은 '지완면제수(之緩面第愁)'로 기록되어 있다.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 (1653년 제주도 표류)이나 같은 국적의 베르테브르(한국명 박연, 1627년)보다 각각 49년과 23년 앞서 조선에 들어온 유럽인이다.

포로들은 심문을 받은 다음 한양을 거쳐 명나라로 압송되었는데, 당시 34세였던 멘데스가 무역상이었던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를 통해 머나먼 아메리카 대륙의 마야문명과 아즈텍문명이 조선과 연결되었다.

저자 주. 에럼바우길은 매우 위험한 길이라, 반드시 길 전문가와 함께 걸어야 합니다. 함께 한 통영길문화연대 회원들과 김용재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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