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삶을 일군 사람들은 늘 부적이 필요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삶을 흔드는 거대한 파도로부터 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의지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믿음의 대상은 많았다. 큰 나무와 큰 바위, 큰 산이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다.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와 들판과 언덕을 호령하는 힘센 동물도 있었다. 어느 곳에서는 뱀이 지켜준다 믿기도 하였다.

안녕의 첫 번째는 먹거리였다. 삶은 단순했다. 먹지 못하면 굶주리고, 허기져 쓰러졌다. 때로는 목숨을 놓아야만 했다. 태풍, 가뭄, 산사태나 힘센 동물의 습격이 몰아치지 않아도, 그날그날 먹거리를 찾지 못하면 삶은 위태로웠다. 떼죽음이 기어들어 왔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먹을 걸 구하러 다닐 때는 잘 몰랐다. 그러다가 집 가까운 곳에서 열매와 줄기, 잎사귀와 뿌리를 길러서 먹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해가 모든 걸 먹여 살린다는 걸. 빛이 성성하면 먹었고, 빛이 시들하면 굶었다.

차츰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비바람으로 생목숨을 앗아가던 하늘이 여전히 두려웠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로 인해 풀이 자라고, 짐승이 자라고, 사람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되면서 감사와 존경의 대상으로 우러렀다. 하늘의 빛은 최고의 의지처가 되었다.

빛이 있어 먹을 수 있었고, 빛이 있어 추위를 녹일 수 있었고, 빛이 있어 짐승들을 살필 수 있었고, 빛이 있어 가족과 친구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빛을 찬양하는 마음은 날로 커져만 갔다. 빛을 그리고, 빛을 노래하고, 빛을 춤추면서 빛과 하나 되길 기원했다.

살아서는 늘 빛이 함께 하기를 바랐고, 죽어서는 스스로 빛이 된다고 믿었다. 빛은 높고 신성했다. 빛을 비난하는 건 용납되지 않았고, 빛을 가리는 자는 나쁜 존재였다. 빛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에 삶의 터전을 닦았다. 신성하고 위대한 빛을 많이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삶을 채워갔다.

집은 남향으로 앉았고, 볕 잘 드는 곳에 밭을 일구었다. 그 너머에 물이 흐르는 곳이 좋았다. 빛과 흙과 물이 함께 하는 곳이 제일 좋은 삶의 터전이었다. 겨울에는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줄 뒷산이 필요했다.

빛은 흰색이었다. 봄부터 여름 지나 겨울까지 햇빛은 늘 희디흰 밝음이었다. 밝음은 흰빛이었고, 흰빛은 밝았다. 흰색은 신성했다. 최고로 존엄했고, 가장 아름다웠다. 흰빛을 따라 배우기를 갈망했다. 인간 됨됨이가 자랄수록 흰색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다. 제멋에 겨운 강렬한 색깔들도 익으면 흰색이 되었다.

옷은 차츰 흰색으로 진화해갔다. 자라는 아이들은 스스로 빛이었기에 굳이 흰색 옷을 입히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누구나 흰색 옷을 입었다. 하늘의 기운을 자신의 몸에 심었다. 땅에 돋아난 흰빛이 되고자 하였다. 흰빛을 닮은 인간이 되는 것은, 아름답고, 존엄하고, 신성하고, 덕스러운 존재가 되는 길이었다. 흰옷은 사람됨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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