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방 8경 중 제3경인 은봉성석(隱鳳聖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옛날 은봉암에는 자연석 세 개가 서 있었는데 그중 한 개가 넘어진 뒤 해월선사가 도를 통하였고, 또 한 개가 넘어진 뒤에 종열선사가 도를 통하였다. 이후 이 돌들을 성석(聖石)이라 불렀는데, 그중 한 개만 남아 새로 나타날 도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성석은 7m 높이의 칼같이 날렵한 부위가 극락보전 지붕 처마와 맞닿아 있다.

푸른 발우 모양의 벽방산은 이래저래 기다림의 산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가섭존자가 발우를 들고 미륵 부처를 기다리고, 말 없는 바위는 다음 도인을 기다리고 있다. 금강산, 속리산과 함께 국내 3대 미륵성지로 꼽히는 미륵산까지 어우러져 통영은 희망의 땅이자, 구원의 고장이다. 통영 사람들은 세상 모두를 고통으로부터 자유와 행복으로 이끌어줄 붓다를 기다려왔다(<최광수의 통영이야기> 제299화, 제301화 "통영의 불교 지명 이야기" 2021년 9월).

기다림은 목마름의 시간이 되기도 하지만, 희망을 실현해나가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봄기운이 물씬한 3월, 벽방산을 오르내리며 유심히 살폈다. 미래의 부처를 맞으려 준비하고 있는 가섭 스님이 계시는지, 다음 도인을 기다리는 성석은 넘어질 기미가 보이는지. 하지만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무심히 산길을 오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잘난 것도 없고, 신비한 힘을 지니지도 못한 평범한 통영 시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우 모양 산속을 오갈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희망은 미래에 올 부처나 재림 예수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울고, 웃고, 욕심내고, 화내고, 다투는 사람들. 평범한 우리가 희망이다. 이 나라 역사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건 언제나 이 못난 사람들이었다. 잘난 귀족 양반들이 외세에 기대어 나라를 팔아먹을 때, 백성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독립만세운동을 펼쳤고 독립의 총칼을 들었다.

103년 전 이 땅의 민중들은 미륵 부처를 기다리는 대신 태극기를 들고서 자유 독립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감염병으로 인한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1918년 발생한 스페인독감으로 전 세계에서 2,000~5,000만명이 사망하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742만명이 감염되었고, 14만명이 사망했다.

식민제국의 총칼도 펜데믹의 공포도 자주독립을 향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높고 깊은 뜻을 꺾지 못했다. 통영 장터를 가득 메웠던 뜨거운 열기도, 부처도 예수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1997년 IMF 구제금융 때 장롱 속 금붙이를 내놓은 것도, 2002년 세계 최고의 월드컵 축구 응원 문화를 보여준 것도, 2007년 태안반도 바닷가에서 기름을 닦아낸 것도, 2016~2017년 촛불로 비폭력 정권 교체를 이룬 것도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미륵불은 이 땅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 한 명 한 명이 미륵불이요, 이들이 모여 만들어가는 희망 세상이 용화세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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