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의 향연이 한창이다. 물빛도 꽃인 양 톡톡 터지는 시간. 앞다투어 피어나는 봄꽃들을 만나며 산길을 걷다 보면, 허리는 굽어지고 무릎은 겸손해진다. 발끝이 소심해지며 행여 앙증맞은 꽃들을 밟을까 조심스러운데 눈은 행복 만땅이다.

세상은 참 다양하다. 사람도 다양하고, 들꽃도 다양하다. 사람 세상에서는 크고 작고, 잘났고 못났고, 옳고 그르고를 따지지만, 야생에서는 그런 게 없다. 그냥 다양할 뿐이고, 그래서 마냥 편안하다. 다양해야 자연스럽고, 다양한 것이 훨씬 아름답다. 다양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작은 충격에도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화의 역사는 다양해지는 과정이었다. 지금도 자연은 시나브로 다양해지려는데, 파괴의 손길이 더욱 매섭다.

이맘때 산길을 걷다 만나는 야생화 중에 산자고가 있다. 그리 유명한 꽃은 아닐 듯한데 무릎 꿇고 바라보는 이에겐 예쁘기 그지없어 사랑스러운 꽃이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양지바른 풀밭에서 30cm까지 자란다. 연대도 지갯길 양지바른 풀숲에서 수도 없이 만났다.

순우리말 이름은 까치무릇이라고 하는데 꽃말이 봄 처녀다. 햇살 좋은 아침에 눈 깜짝할 사이에 피었다가 구름이 끼거나 어두워지면 오므려 버린다. 꽃잎을 오므렸을 때의 모습이 비슷해 동아시아 튤립이라 불리기도 한다. 전 세계에 50여 종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1종만 발견된다고 한다.

자고(慈姑)는 자비로운 시어머니를 뜻한다. '자비'와 '시어머니'는 옛이야기에서 만나기 어려운 조합이다. '봄 햇살에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 햇살에 딸 내보낸다'는 편견과 편애, 뿌리 깊은 갈등의 옛 시절을 떠올리면 낯설기 그지없다. 며느리밥풀꽃이나 며느리밑씻개 같은 이름들과는 정서적으로 많이 동떨어져 있다.

산자고 이름에 어린 아름다운 옛이야기는 이렇다. 홀로 삼 남매를 키운 여인이 두 딸을 시집보내고, 막내아들을 데리고 살았다. 아들을 장가보내고자 했지만, 너무 가난하여 혼처를 찾기가 어려웠는데, 어느 해 한 처녀가 보따리를 들고 찾아왔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이 집에 살러 왔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고마운 여인은 며느리를 친딸처럼 보살피며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해 따스한 봄날 며느리에게 등창이 생겼는데 가난해서 의원을 찾기도 어렵고, 약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우연히 산에서 발견한 이 꽃을 며느리의 등창에 발랐더니 깨끗하게 나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어진 시어머니라는 뜻의 산자고(山慈姑)라 부르게 되었다. 산자고는 실제로 염증을 억제하는 효과가 커서 약재로 사용된다. 더욱이 암을 치료하는 효능이 탁월하여 항암제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은 사실 역사가 그리 깊지 않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 여인의 시집살이를 강요한 가부장적 유교 문화가 고부갈등을 빚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고려 이전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생물다양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며, 매일 50~100종의 생물이 사라지는 지금, 다행스럽게도 산자고는 통영의 야트막한 언덕 풀숲에서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산자고를 바라보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원래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사랑의 관계임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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