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 남쪽 산양읍 신전리 226-1, 현재 '그'가 거주하는 주소다. 남쪽 바다를 향해 열린 고즈넉한 언덕. 영화음악의 선구자 정윤주 선생의 묘를 안내하는 입간판을 보고 차를 세운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알리는 간판은 없다.

들은 바대로 입간판이 안내하는 쪽으로 산길을 오른다. 복숭앗빛 언덕의 자태를 잠시 감상한다. 봄의 절정이다. 맞은 편 뉘 댁 묘원에 돋아나는 푸른 새잎들은 참 가지런도 하지. 여전히 '그'의 묘는 종적이 없다.

SNS에서 찾은 사진 속 방향으로 길을 찾으려니 막막하다. 길은 있을 텐데 길이 없다. 겨울을 지나며 대지가 맨살을 드러낸 지금도 이럴진대, 봄비 내리고 풀들이 자라기 시작하면 장사라도 힘들겠다.

발해의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뛰어든 바닷길, 거친 풍랑 한 가운데서도 '그'는 막막함을 느끼지 않았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 탐험 정신, 발해정신". 그런데 오늘 '그'에게로 가는 백여 미터의 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길을 모르니 이쪽저쪽 드나들며 길을 찾는다. 길을 아는 이에겐 쉬운 일이나, 길을 모르는 이에겐 난감하기 그지없다. 길이 묵었으리라 생각하며 길 없는 곳을 더듬었다 되돌아 나온다. 농장 울타리에 가로막혀 또 돌아 나온다. 다시 신발 끈 고쳐매고 단장된 묘원을 가로지르니 너른 풀숲을 만난다.

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오르기를 잠깐, 작은 비석 머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계단 없는 흙길을 어영차 오르니, 비석의 전문이 보인다. "발해 1300호 탐사대장 仁同張公哲洙之墓(인동장공철수지묘)." 심.쿵. '여기 계셨구나'. 생각보다는 깔끔하다. 비석과 봉분, 상석을 관리한 손길이 선명하다. 수습된 '그'의 신체 일부만이 잠들어있는 봉분은 호석으로 둘렀는데, 떼가 고르지 않다.

올릴 거라고는 물밖에 없어, 물통 뚜껑을 열어서 상석에 놓고는 두어 걸음 물러나 묵념을 올린다. 봄 햇살에 목덜미가 후끈하다. 감로수로 음복하며 목을 축인 다음 찬찬히 비석 뒷면을 살펴본다. "러시아국립극동대학교 해양법 명예박사. 역사 및 해양 연구 분야에 관한 공적을 기리면서 발해 1300호 탐사대 장철수 대장에게 영구적으로 극동대학교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합니다. 러시아국립극동대학교 교수회의 결정문. 1998년 1월 29일"

무덤에서 열 걸음가량 떨어진 왼쪽에 "발해 1300호 추모비"가 있다. "동으로 동으로 해를 찾아온 우리 민족에게 어머니의 태반 같은 동해의 겨울 바다를 길이 15미터 폭 5미터인 뗏목 발해 1300호가 떠가고 있었다". 추모비의 첫 구절이다.

1997년 12월 31일 대한청년 세 명과 함께 뗏목을 타고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떠났던 '그'는 1300년 전 발해의 역사를 기억하고 되살렸는데, 24년 전 그의 역사를 우리는 잊은 것일까? '그'가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던 이 땅의 청년들은 아예 '그'를 모른다. 1월 24일 제삿날, '그'와 '그'의 꿈을 기리는 이들 몇몇이 묘를 찾는 게 전부다. 그의 꿈은 정말 일본 오키 제도 앞바다에서 물거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최광수의 통영이야기> 제222~224화 "철수 형의 꿈을 찾아 1~3").

"기억하자.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우리 모두 이야기하자. 그들의 의거를, 그들의 처절한 최후를, 또 하나 새로 만들어진 우리의 역사를. 장철수 이덕영 이용호 임형규 대원들의 명복을 삼가 비 옵니다." 비문의 끝 문장이 봄 햇살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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