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일(秋日) 서정]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 닮은
저 붉덩이 한 알 까치밥
달 항아리 속에 핀
조선의 얼
아, 눈이 시리다

※시작(詩作)노트

빈 창공에 인정의 붉은 점 하나 찍어 놓은 까치밥 한 알 남겨 둘 줄 알았던 조선의 마음.

생명을 가진 작은 벌레와 새 한 마리까지 사람을 넘어 함께 나누고 베풀줄 알다니 훈훈하고 곱기만 하다. 달항아리 여백 닮은 여유 잃지 않았도다.

그 여백은 자신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영원을 맞아들이기 위한 대문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조차 인간과 함께 모두 생명순환의 그물로 얽혀있다는 인드라망의 이치를 우리 선조들은 일찌기 깨달았던 것일까? 아니면 석과불식(碩果不食), 큰 열매는 먹지않고 남겨둔다는 주역에서 도래했다는 이 말 그대로의 가르침을 어쩜 삶에서 부터 알게 모르게 실천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까치밥 몇 알 걸려있는 감나무 가지 사이로 비치는 만추의 푸른 하늘 우러르면 오늘따라 눈은 물론 마음까지 더욱 시려온다.

《정감어린 기억 속의 감나무》

‘감나무는 영혼의 나무, 겨울로 가는 길목에 문이 되어 섰다. 깊은 곳에서 허심으로 하늘을 받들고, 지상 비치고 하늘을 또 빛낸다’고 이 성선 시인은 말하고 있다. 한국인에게 감나무만큼 친숙한 나무가 또 있을까? 남쪽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감나무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오래된 세대는 감나무에 대한 아련한 향수 또는 추억 한 두 개쯤은 품고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좋은 기억은 시간을 천천히 흘러가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감나무에 대한 기억이 그것이다. 그 시절 인연의 향기가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조차 감사하게 느껴지게 되는 이유다.

가을이면 감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고운 붉은 빛을 가져다가 제 몸을 단장한다. 그리하여 잎과 속살을 찌울 열매에 감빛으로 분칠을 하고 수줍음 타는 새색시 마냥 쪽빛 하늘과 짝지어 있다. 그 어느 화공도 담아낼 수 없는 솜씨로 가을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감나무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홍시가 열리면 엄마가 생각난다’는 노래에서 느끼듯 감나무는 붉은 홍시처럼 깊고 진한 어머니의 사랑을 회상하게도 한다. 잘 익은 감을 바라보며 ‘ 색승금옥의 감분옥액청(色勝金玉衣 甘分玉液淸)’ 즉 감나무의 색은 금빛 나는 옥보다도 더 아름답고 그 맛은 맑은 옥액에 단 맛을 더한 듯 하다고 했으니 과일에게 주는 찬사에 이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또 감나무의 학명은 디오스피로스(Diospyros)인데 여기서 디오스란 신이란 뜻이고 피로스는 곡물이란 뜻이니, 서양에서도 과일의 신이라 칭할 만큼 훌륭히 여겼나 보다. 감나무 종류에는 크게 감나무와 고욤나무가 있다. 감나무의 한 품종인 단감은 추위에 약해서 남부지방에서만 재배된다. 고욤나무는 작은 새 알만한 크기로 먹을 육질이 별로 없고 씨만 잔뜩 들어 있어서 식용으로는 잘 쓰지 않는다. 그러나 감나무 접붙이는 밑나무로 고욤을 쓴다. 우리 속담에 ‘고욤 일흔이 감하나 보다 못하다’ 라는 말이 있다. 자질구레한 것이 아무리 많아도 큰 것 하나를 못 당한다는 의미이다.

감은 한자로는 시(柿)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조율이시(棗栗梨柿)라 하여 대추, 밤, 배와 같이 감을 제사상에 빠뜨리면 안 되는 과일로 꼽았다. 특히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야만 감이 달리듯, 살을 찢는 고통을 감내하고 인고의 노력을 통하여 학문을 연마해야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교훈으로 삼고자 제사상에 올렸다는 설도 있다.

감이 열리는 나무의 속이 검은 것은 자식을 위해 속이 타는 부모의 마음이라 하기도 한다. 주홍의 열매가 달린 잔가지는 툭툭 잘 부러지지만 감나무 몸통의 재질은 매우 단단하여 목재로서도 유용했다. 특히 검은 무늬가 들어간 것은 먹감나무라 하여 최고의 가구재로 쓰였다. 예전엔 골프채의 나무 헤드에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약한 것 같지만 또 한없이 강하기도 한 것이 영락없이 우리네 민초들의 삶을 닮았다.

“고향집 고택 뒤 뜰을/코흘리개 때부터 지켜온/먹감나무 한 그루/ 올핸 더욱 알알이/열매 매달았구나/홍시로 익은 세월/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였을까/구곡간장 시커멓게 타들어간/세월 뒤로 하고/ 저렇게 결 고운 먹빛 속 살결 / 간직하고 있었구나 //겉 번지르한 치장에/눈 멀고 귀 먼 세상의 잣대/ 허위와 기만이 빛나는/길 아닌 길 위에서/오늘 비로소 알았네/저토록 먹빛 깊은 색으로/안으로 안으로만 다져갔던/속 깊은 나무 였음을” (최진태의 ‘먹감나무’).

옛 사람들은 감나무 잎이 종이가 된다하여 문(文)이 있고, 나무가 단단하여 화살촉으로 쓸 수 있으니 무(武)가 있으며, 겉과 속이 모두 똑같이 표리부동 하지 않아(忠)이 있고 , 노인이 치아가 없어도 먹을 수 있는 과일이므로 효(孝)가 있고 늦가을까지 남아 달려 있으므로 절(節)이 있다고 하여 감나무의 오상(五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즐겨먹는 감은 맛도 좋지만 비타민 A. C등의 영양분도 풍부하여 노화방지, 피로 회복, 배탈이나 설사를 멎게 하는 효과도 있다. 감잎 역시 성인병 예방을 위해 감잎차로도 많이 애용되고 있다. 감물을 들여 만드는 갈 옷이나 이불 등도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쓰인다.

단풍든 감나무를 활활 타오르는 화신(火神)이라 표현했던 감 나뭇가지 사이로 스민 노을빛이 서러울 만큼 눈부시다. 조롱조롱 달린 감에 담긴 추억들이 한 가득 안겨오는 하릴없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포근한 느낌이 넘쳐나는 참 아름다운 우리의 나무, 정감어린 기억속의 감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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