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변산바람꽃이랍니다. 사람들은 제가 통영에서 새봄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꽃이라고 하더라고요. '제일'이라는 말이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2월이면 힘껏 땅을 박차고 나오니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겨우내 피는 동백꽃도 있고, 얼음을 비집고 나오는 복수초도 있고, 높은 가지에서 피는 매화도 있지만, 사람들은 가녀린 저를 보며 참 좋아들 하시죠.

네, 그래요. 저는 참 작고 앙증맞답니다. 반 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키라, 산길 걷는 이들이 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밟아버릴 수도 있지요. 또 하나 제 특징을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이 보시는 꽃잎은 실제 꽃잎이 아니랍니다. 하얗게 보이는 건 사실 꽃받침잎이에요. 놀랍죠? 그럼, 꽃잎은 어딨냐고요? 깔때기 모양의 녹황색이 꽃잎이고, 청보라색 수술과 연두색 암술로 이루어져 있죠. <최광수의 통영이야기> 제248화 '미륵산의 봄꽃 향연 1, 변산바람꽃' 2020년 3월

변산바람꽃이라는 이름이 특이하다고요? 변산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한국 특산종으로 세계에 알려졌죠. 하지만 사실 이건 조금 우스운 예기예요. 서해안과 남해안 곳곳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저희를 수많은 주민이 봐왔는데, 1993년에 처음 "발견"했다고 하니 우습지 않나요? 아마 제 이름에 '변산'이라는 지명이 있어 사람들이 궁금해하니 얘깃거리가 되었고, 마치 그 이전에는 이름이 없었던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었겠죠. 이건 박사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박사님은 저를 세상에 널리 알려주신 고마운 분이시죠.

오늘은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인사드려요. 옛사람들은 말했답니다. 산은 오르는 게(登山) 아니라 드는 것(入山)이라고요. 산은 쾅쾅 밟으며 정복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감사할 고마운 존재입니다. 산 없이 이 땅에서의 삶은 가능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산은 겨울 북서풍을 막아주고, 목숨을 이어주는 많은 먹거리를 주었습니다. 심란한 이와 몸이 약한 이에게는 안식처가 되고 재충전의 장이 되었습니다.

산은 마르지 않는 강물의 든든한 후견인으로 뭇 생명의 목을 축여왔습니다. 구석구석에 곤충과 짐승들, 갖가지 풀과 나무를 품어 호모 사피엔스들이 외롭지 않게 하였습니다. 또한 사시사철 변신하며 이 땅의 사람들을 세상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창조적이게 도왔습니다. 철학과 사상,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습니다.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는 골짜기마다 피란민을 품어 가족과 마을의 삶을 지켜주었습니다. 심지어 맞서 싸울 용기와 무기도 아낌없이 내어주었습니다. 이 땅에 산이 없었다면, 삶은 마른 흙덩이처럼 궁핍하고 위태롭고 비루하였을 겁니다.

이렇듯 산이 정말 고마운 존재라면, 산에 깃들어 사는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해 주세요. 산은 나무와 풀과 수많은 산짐승과 새, 곤충들이 어우러진 생명의 대 향연장이랍니다. 지구 생태계의 가장 기초를 이루는 세균과 바이러스도 포함되죠. 산과 산에 사는 모든 생명은 하나요, 그 산에 기대어 사는 인간도 당연히 산과 하나랍니다. 갯가에 기대어 사는 인간의 삶이 갯가와 하나이듯이 말이죠.

최근 봄소식을 기다리는 이들이 저를 찾아 미륵산 계곡으로 오르시는 분들이 많이 늘고 있어요. 힘들게 움을 틔운 저희로서는 참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너무 많은 이들이 찾아오셔서 살짝 겁이 나요. 거기다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와서 멋진 사진을 찍으려 이리저리 움직이시는 분들은 정말 무서워요. 그분들 발에 짓밟힌 친구들이 꽤 많답니다.

통영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다시 한번 부탁 말씀드릴게요. 특히 사진 '한 컷'을 얻기 위해 주변을 마구 헤집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긴 겨울을 견디며 막 피어난 저희를 온전한 생명으로 보아주세요. 혼자 보는 아름다움보다 두고두고 많은 이들이 함께 보는 아름다움이 더 귀하다고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 다 아름답습니다. /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 그것이 능동적이기 때문입니다. / 세상은 물질로 가득 차 있습니다. / 피동적인 것은 물질의 속성이요 / 능동적인 것은 생명의 속성입니다." 박경리 <마지막 수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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