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죽이는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이토가 저지른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자 한 데 있었다. <하얼빈>의 저자 김훈의 통찰이다.

이순신 장군이 한 명의 왜적이라도 살려두지 않으려 노심초사한 것은 적을 죽이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오로지 이 땅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왜적의 칼끝에 죽어나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적을 죽여야만 했다.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이 땅을 피바다로 물들인 왜를 무찔러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만들고자 하였다. 죽이지 않고는 평화를 만들 수 없었다. 죽여야만 할 때 죽이는 것은 살생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죽임의 목적이 죽임에 있지 않고 살리는 데 있었음은 이순신과 안중근의 삶이 만나는 지점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죽었다. 살리기 위해 죽였고, 살기 위해 죽었다. 그랬다. 두 사람의 죽음은 삶의 연장이었고, 죽어서 더 오래 더 바르게 살았다.

두 사람이 자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다. 둘은 의연했다. 죽임이 목적이었으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죽임 너머 살림이 자기 죽음마저 구원하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했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의인은 살아서 죽이고, 죽어서 살았다.

이순신과 안중근의 살생을 넘어선 생명과 평화의 힘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사랑이다. 사랑은 살리는 힘이다. 생명을 무한히 애정하고 생명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 낮은 곳에서 생명을 보듬고, 고통받는 생명을 위해 멍에를 대신 짊어지는 것이다. 사랑이 없었으면 두 사람의 죽임을 우리가 영원토록 기억하고 칭송하겠는가?

작은 사랑은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큰 사랑은 아픔을 함께하는 것이다. 더 큰 사랑은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자기 온 몸과 마음을 던지는 것이다. 범인(凡人)으로서는 넘보지 못할 크나큰 사랑에 우리는 역사를 빚졌고, 수많은 생명이 삶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유교의 사랑을 했고, 안중근은 기독교식 사랑을 나누었다. 동시에 두 사람은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의 사랑을 펼쳤다. 어떤 종교와 이념도 이 땅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데 뜻을 두었다. 이 뜻은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아버지 때부터 사랑은 꽃을 피웠다.

생래적으로 이 땅의 사람들은 정복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걸 멀리했다. 그것은 사람의 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짐승의 길도 아니었다. 짐승만도 못한, 어리석은 자들이 좇는 허망한 길이었다. 모두가 죽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만 생명이 피어나는 봄이다. 생명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름다운 봄꽃과 함께 바닷길을 걸으며 이순신과 안중근의 대화에 귀 기울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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