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었을 때 남해안을 훑으며 조선 수군을 다시 일으킬 비책을 강구했다.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전선을 수습하고, 적의 동태를 살폈다. 자유시 참변 후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황망함에 넋을 잃고 있는 이들을 추스르며 사태 수습에 발 벗고 나선 이가 홍범도였다. 나아가 그는 공산당에 진상조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나는 승리를 위해 포악한 명나라 장수 진린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의 지휘통제권을 인정하고, 우리 수군의 전공을 진린에게 양보하고, 판옥선도 한 척 주었다. 조정 대신들은 내가 진린과 다투어 전세가 불리해질 것이라 걱정했지만, 그들은 나를 몰랐다. 승리를 위해 명나라 장수의 통제를 받는 것쯤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공을 빼앗기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에겐 오직 승리만이 필요했다.

홍범도는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연해주 땅에 살면서 독립전쟁을 하려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연해주는 러시아가 망하고 새로 들어선 소련의 땅이었고,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살던 이승만이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얻고자 했듯이, 중국에 살던 김구가 중국과 연합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얻고자 했듯이, 소련 땅에 살던 홍범도는 소련 공산당의 힘을 빌려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그때의 소련은 레닌의 공산당으로 스탈린의 공산당과 달랐다. 그때는 빨갱이라는 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독립군에게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돕겠다는 볼셰비키의 선언은 외면할 수 없는 기회였다.

부디 그대들 기준으로 과거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 시대마다 기준은 바뀌기 마련이니. 남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기 위해서 선택한 것을 후대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과 잠자리를 함께한 걸 두고 400년 뒤 그대들 세상의 기준으로 파렴치한이라 부를 건가? 부인을 6명 두었던 세종을 희대의 카사노바라 치부할 텐가?

많은 이들이 노량에서의 내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한치의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 백성을 살리는데 한목숨 바친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홍범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와 같은 행운을 얻지 못했다.

스탈린의 무자비한 소수민족 탄압 정책으로,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지도자 2, 3천 명이 살해당하고, 17만여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무려 3,000킬로나 떨어진 황무지에 버려진 사람 중에 홍범도도 있었다. 첫 겨울을 토굴에서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새봄에 '맨' 손으로 땅을 일구고, 집을 짓고,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홍범도는 극장의 문지기가 되어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화를 보러온 고려인들의 등을 두드려 주고는 쓸쓸히 죽어갔다.

부디 나를 24전 24승의 무패장수로 기억하지 말라. 백성을 살리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한목숨 바친 이로 기억해 주길 바란다. 마찬가지로 홍범도를 봉오동의 영웅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공산당이라고 손가락질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웃 공산국가와는 손잡고 살면서, 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백성을 살리기 위해 뼈를 갈고 피를 뿌린 용사를 역사에서 지우려 해서는 안 된다.

나라 잃고 남의 땅에서 처절하게 목숨을 이어가는 동포들을 살리고, 민족의 기상을 드높인 장수를 지우고, 어찌 내게 제사를 올린단 말인가. 그의 정신이 지금 그대들 핏속에 흐르고 있다. 나의 뜻이 그대들 속에 살아있듯이.

저자 주. 이순신 장군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목소리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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