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통영영화제가 열린다. 통영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통영영화제는 너무 당연하다. 늦은 감이 든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영화제가 너무 많다. 통영에 또 만들 필요가 있나. 통영에도 문화행사가 많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역사적 정통성 한 가지만으로도 제1회 통영영화제는 '옳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인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월 13일 흰색 바지에 짙은 상의, 중절모를 쓴 정장 차림의 "통영청년단 활동사진대" 청년들이 서울역에 내렸다. 영사기를 들고 전국 순회상영을 다니며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모습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자.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주춤해지던 독립 의지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에 힘입어 3월 17일 연해주에 첫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탄생했다. 뒤이어 4월 11일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했고, 서울에서도 4월 23일 한성정부가 생겨났다.

세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임시정부다. 이런 열망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서간도와 북간도, 연해주의 무력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그 정점이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였다(<최광수의 통영이야기> 제371화, 제372화 "이순신 장군을 '추앙'하는 우리가 홍범도 장군을 지울 수 없는 이유 1, 2". 2023년 9월).

한편 국내에서는 계몽 교육과 민족의식 고취, 경제자립 운동, 과학인재 양성, 스포츠 보급 등을 통해 독립의 토대를 닦아나갔다. 3.1독립만세운동의 기상을 이어가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청년단이 조직되었고, 1920년 12월에는 전국 120여 개 청년단체들이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통영에서도 1919년 7월 통영청년단이 창립되었다(<최광수의 통영이야기> 제77화, 제79화. "통영청년단 이야기 1, 2". 2016년 9월).

조선총독부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고 문화사업을 펼쳐나갔다. 당연히 내선일치 홍보가 목적이었다. 영화도 동원되었다. 영화는 이미 1908년경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지배 강화 수단으로 도입했다. 이들 영화는 조선의 상황을 은폐하는 내용들로 채워졌다.

일제의 문화통치 의도를 간파하며, 영화를 통해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려는 노력이 전국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통영청년단에서도 영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통영청년단 활동사진대’를 창설하였다.

전국 곳곳에서 활동사진 순회영사가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일회성 행사였다. 하지만 통영의 경우는 달랐다. 1921년 통영청년단에서 조직한 '통영청년단 활동사진대'는 1921년부터 1923년 사이에 전국을 순회하며 영화를 상영하였다. 대도시부터 산간벽지까지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았다. 수익은 전액 지역 단체에 기부했다.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방정표 통영청년단 단장과 한국 최초의 영사기사였던 이필우 씨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영사기와 필름을 사 왔다. 지역 유지들이 갹출한 돈을 청년단에 무이자로 대출해 주었다. 당시 통영청년단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재력과 기상과 안목을 함께 갖추었기에 가능했다.

전국을 누빈 사진대의 인기는 대단했다. 희극물과 사회극, 서부영화를 넘나드는 활동사진에 사람들은 울고 웃으며 시대와 가까워졌다. 이런 판타지를 가져다준 정장 차림의 말쑥한 통영의 모던 보이들. 이들로 인해 통영은 영화로 통했다.

1914년 건립된 봉래좌(봉래극장)는 통영시민들이 활동사진을 즐기던 극장이었다. 지금 통제영 거리 역사홍보관이 바로 봉래극장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곳 마당에서 제1회 통영영화제가 펼쳐진다. 10월 27일, 102년 만에 통영의 청년들과 노블레스들이 꿈꾸던 세상이 다시 열린다.

저자 주. 이 이야기는 창원대학교 이성철 교수님의 논문, ‘1920년대 초 경남 통영청년단 활동사진대에 관한 연구’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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