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傾聽)

'통하면 살고 막히면 죽는다'* 했다
말이 통한다는 건 살을 섞는 것보다
관능적 행위, 잘 들어 준다는 건
소통과 사랑의 첫걸음이요
성자(聖者)의 몸짓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로써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_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

[시작(詩作)노트]

살아있는 것은 막히면 죽는다. 이것이 생명의 기본원리다. 사람 사이의 호흡은 소통이다. 말과 글, 행동으로 하는 소통에 문제가 발생하면 숨이 막히는 경우와 똑같은 고통을 느낀다.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이란 잘 듣고 잘 반응하는 과정이다. 사람의 의사소통을 분석해 보면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인데 여기서 듣기의 비율이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고 한다.

만약 누군가의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한 시간 이상 경청할 수 있다면 둘 중의 하나다. 딴 생각을 하며 듣는 척했거나 아니면 경청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것이리라.

그러므로 경청은 대단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높은 수준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기에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코미디언을 죽이는 방법은 하품 한 번이면 족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듣는 자세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너도 나도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고, 들려주고 싶고, 털어놓고 싶다. 나의 이야길 들어 봐, 나를 좀 봐 줘, 나를 좀 알아줘, 나는 너무 힘들어, 나는 너무 외로워, 나는 너무 고독해, 나는 너무 슬퍼, 나는 너무 기뻐, 나는 너무 즐거워, 나 대단하지 않아, 내 아들 이번에 대기업 입사했어, 내 손주 녀석 너무 예쁘지, 나 고급 아파트로 이사했어, 나 이 정도로 대단해, 나는 이만큼 잘 견뎌 왔어, 나는 불안해, 나 어떡해 등등 감정의 찌꺼기들을 상대에게 배출시키고 싶다는 강력한 욕망의 산을 쌓아 놓고 사는지도.

말하고 싶고 털어놓고 싶은 나를 억제하고 상대의 말에 귀를 먼저 기울인다는 그 자체가 대단한 내공과 수양과 훈련을 요구하게 된다.

인간관계는 소통에서 시작되고 소통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소통은 쌍방통행이 되어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래서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혀가 아니라 귀를 먼저 내미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가 아무리 상대방에게 어떤 달콤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자기가 말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의 절반만큼도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나, 경청(傾聽)을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공자는 육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순(耳順)’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

문맹(文盲)은 글을 못 보고, 색맹(色盲)은 빛깔을 분간하지 못하듯, 청맹(聽盲)은 상대의 깊은 마음속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소통이란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늘 자기 방식을 고집하게 된다. 즉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고자 하는 경청 자세가 중요하다. 그것이 적극적 경청(active listening)이고 공감적 경청(empathetic listening)이다.

성(聖) 자를 보면 참으로 뜻이 깊다. 이(耳)·구(口)·왕(王) 자의 3요소가 합해진 글자다. 성인은 먼저 남 얘기와 역사의 소리와 진리의 소리를 조용히 듣는다. 모두 듣고 난 후에 입을 열어 말씀을 한다. 듣고 말하는 가장 뛰어난 존재가 성인이다. 듣는 것이 먼저고 말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이(耳) 자를 먼저 쓰고 구(口) 자를 나중에 쓰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께서 중생과 고통소리를 본다는 관세음(觀世音)에 이르러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줄여서 관음(觀音)이라고도 한다.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고 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며, 보고 듣는 시청각 기능의 중요성을 생각게 한다.

소통의 기본은 경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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