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이기심*

은행잎 책갈피의 추억도
'살아있는 화석' 칭호도
동정녀 닮았다는 경외감도
'공공의 적'이라는 명제 앞에선
그저 한갖 허언일 뿐

*은행 열매에 구린내가 난다는 이유 하나로 암나무에 약물을 주입하거나, 차츰 베어낸다는 소식이 전국에서 들려온다.

[시작(詩作)노트]

《천년의 사랑, 은행나무》

하나의 문을 닫고 또 하나의 문을 준비해야 하는 계절 가을이다. “은행나무에 하늘이 노랗게 내려앉는다 /겨울이 오기전 잠깐 밟아보는 푹신한 하늘” 이 하석의 ‘하늘’이란 시의 한 구절이 떠올려지는 계절이다. 가을이라는 계절의 색은 역시 노란색일 것이다 가을 들판의 누렇게 익은 벼이삭, 노란색 국화 등등 있지만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노란색의 대명사는 노랗다 못해 거의 황금빛으로 물드는 은행나무가 으뜸이다. 샛노란 은행나무 잎을 책갈피로 대신하여 그 위에 연서를 썼던 일들은 감성 풍부한 젊은 날의 초상화일 것이다. 바바리코트 깃 올린 채 이브몽땅의 ‘고엽’ 샹송 울려 퍼지는 (은행나무가로수) 덕수궁 돌담길 풍경도 종종 되살아나는 가을날이다.

지구상에는 많은 종류의 동식물이 살고 있다. 고생대부터 진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그때 그 모습대로 지금에 이른 것 중엔 동물로는 도룡농이며 벌레로는 바퀴벌레, 식물로는 은행나무를 들고 있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만큼 은행나무는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왔기에 오늘까지 긴 생명력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은행(銀杏)이라는 말은 ‘은빛 살구’를 의미 한다. 껍질을 벗기면 흰색이 드러난다고 하여 백과(白果)로도 불린다. 나무를 심으면 손자 대에 가서 열매가 열려 공손수(公孫樹)로도 불린다. 우리나라의 서원과 향교에서는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다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살구나무의 ‘행’과 은행나무의‘행’이 같은 이름이어서 오래 못사는 살구나무 보다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를 택해 심었다는 설이 있다. 은행나무는 일가친척 없는 혈혈단신이다. 은행나뭇과 은행나무 속에 속하는 이 나무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 수 있었는지 그저 신비할 따름이다.

이 땅의 선조들은 약 1,500년 전부터 사찰과 향교, 서원, 마을 공터 등에 은행나무를 심어 보호해 왔다. 현대에 와서는 가로수로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 차량 등에서 나오는 배기가스 등 공해에도 잘 견디며 좀처럼 병에 걸리지 않고 해충의 피해도 거의 받지 않는 나무로써의 역할이 지대하다. 열매와 잎은 약재로써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은행 열매를 둘러싼 과육은 자극적인 냄새가 있고 피부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생으로 먹어도 탈이 날 수 있으며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오히려 해가 된다. 목재는 단단하고 질이 좋아 각종 가구 및 조각재로 활용됨은 물론이며 바둑판 밥상 등을 만드는데도 유용하게 쓰인다. 은행나무는 암그루 수그루가 따로 있는 자웅이주 식물이다. 암수를 구별하기 어려운 나무로도 유명한데 최근 조기에 구별할 수 있는 감별법을 개발했다는 소식이다. 앞으로 농가에는 은행열매 채집이 가능한 암나무를, 거리에는 악취를 풍기지 않는 수나무를 심을 수 있을 듯하다.

사람보다 오래 사는 나무 종류도 많다. 세계적으로 몇 천 년 넘은 나무도 부지기수라 하니 백년을 못사는 사람이 그 나무에 쌓인 연륜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에는 천연 기념물 및 보호수, 노거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수백그루가 넘는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살아온 긴 역사만큼이나 다른 나무가 갖지 못하는 태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 중국 절강성에 있는 천목산(天目山)에서 은행나무의 존재가 확인되었는바 은행나무의 자생지가 하늘의 눈을 의미하는 천목 산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사람들은 오래 사는 나무를 신목(神木)이라 부른다. 신목에 걸맞는 수령과 기상을 갖춘 은행나무가 많지만 아마도 그 으뜸은 양평 용문사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은행나무일 것이다.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30호, 대한민국 나무 대통령 등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1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화재며 6,25전쟁 참화와 폭격 등을 겪으며 살아온 영험 있는 나무인 것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는 말라 죽었다가 230년이 지난 후 신기하게도 다시 되살아난 부활의 은행나무도 있다. 용문사와 순흥의 은행나무는 우리에게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한석규 심혜진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를 만든 강제규 감독은 소설가 양귀자의 ‘천년사랑’과 더불어 더욱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은행나무에서 위대한 사랑 이야기를 이끌어낸 사람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를 모델로 했다. 은행나무 나이에 빗댄 ‘천년의 사랑’이라는 테마가 특이하다. 오늘도 전국 곳곳에 서있는 은행나무들은 행여 천년 뒤에 올 사랑을 위한 인고와 기다림의 미학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랑에 우는 연인들이여, 오늘 그대들의 인연이 못 닿았다고 너무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마시라. 천년 뒤의 사랑을 기약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저 고불(古佛)같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다짐을 해보고 또 맹세를 해볼 일이다.

'우리 동네 별다방 앞 저녁 9시'/이진희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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