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는 우리나라 농업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씨없는수박'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는 육종학의 우수함을 보여주려고 재현한 것일 뿐, 그의 위대함은 따로 있다. 쌀과 김장 김치를 비롯해 우리가 먹는 농산물의 대부분은, 그가 없었다면 우리 밥상에 없을 것이다. 그의 장례식이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진행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 우장춘 박사 덕택에 통영 납도와 욕지도가 귤나무 섬이 된 사연을 살펴보자.

먼저 그의 뼈아픈 출생 배경이다. 그는 우범선의 아들이다. 우범선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테지만,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인물이다. 시해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여인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우장춘이다.

우장춘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매국노가 아니라, 왕조의 끝을 새 나라의 시작으로 보았던 애국자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우장춘은 세간의 손가락질과 어머니의 말씀 가운데, 아버지와 자신의 존재가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았다.

도쿄제대 농학실과를 나와 세계 육종학계의 거장이 된 우장춘은 1934년 <조선중앙일보>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다. 이듬해 그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는 역사적인 논문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이종교배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은 생식능력이 없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우장춘이 배추와 양배추라는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해서 유채 같은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밝혔다.

그는 일약 세계 과학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해방 후 그를 국내로 영입하려는 지난한 노력이 일어났다. 농산물 생산이 바닥을 치며 심각한 식량난에 처해있을 때였다. 대부분의 씨앗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다가 일본과의 국교 단절로 종자 수입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1950년 3월 8일 우장춘 박사는 부산항을 통해 한국으로 귀국했다. 가족을 모두 일본에 두고, 혈혈단신이었다. 경상남도 농림국장이었던 김종을 비롯한 "우장춘 박사 귀국 추진위원회"의 집요한 노력 덕택이었다. 교토에 있던 대형 종자회사 연구농장장 자리를 버렸다.

우장춘 박사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국내에서 모금하여 보낸 100만 엔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각종 장비와 종자를 구입하는데 써버렸다. 일본 고위 공무원 5년 치 연봉이었다. 그의 귀국 일성은 이랬다. "저는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께 약속합니다."

6.25 전쟁 중에도 부산에 있는 연구소에서 그는 종자 개발에만 매달렸다. 진도에서 배추와 무, 고추 종자를 개발했고, 제주에서 귤 재배를 추진했다. 강원도에 감자를 키웠고, 고수확 벼 품종 개발에 인생의 마지막을 쏟아부었다.

1958년 우장춘 박사는 통영 납도를 방문하였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66년 1월 6일 '제2의 밀감산지... 남해의 납도'란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다. "동백 나무가 빽빽히 섬둘레를 병풍처럼 감싸 방풍림이 돼있는데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알맞다는 말을 당시 우리나라 농학계의 권위였던 고 우장춘 박사가 전해듣고 현지를 답사, '제주도 보다 천연적 조건이 더 좋다'는 결론을 내리자 섬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밀감의 묘목을 심었다. 처음으로 밀감 묘목 4백 그루를 심었던 박종식(42)씨는 올들어 처음으로 수확, 15만원을 벌었다."

사실 통영에서 밀감이 처음 재배된 것은 그 이전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을 드나들던 욕지도 사람들이 밀감 묘목을 가져다 심었고, 1955년에 첫 수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숫자가 많지 않았는데, 우장춘 박사의 답사 이후 납도와 욕지도에서 본격적으로 밀감 재배가 시작되었다.

밀감나무는 한때 '대학 나무'라 불릴 정도로 고소득 수입원이었다. 하지만 한파와 경제성 하락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는데, 욕지도에서는 여전히 밀감을 수확하고 있다. 껍질이 얇고 단맛이 강한 제주산 만생종과 달리 조생종인 욕지산은 단단하면서 신맛과 단맛이 어우러져 선호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납도를 방문한 이듬해 우장춘 박사는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이때 병상에 있던 우 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흘 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가족을 일본에 남겨두고 홀로 귀국할 때의 약속대로 한국에 뼈를 묻었다.

저자 주. 욕지도와 납도의 밀감 재배 이야기를 들려주신 욕지향토사연구회 이철수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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