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仙人)

다성(茶聖) 육우 손길 담고
허왕후의 발길 따라

깊은 명상 흰 잠 털며
정갈하게 오셨구려
도솔천 천년의 미소 눈부시다

[시작(詩作)노트]

산청군 덕산면 보림선원이 자리잡고 있는 뒷산에 오르니 지천에 차나무가 들어서 있다. 예전같았으면 무척 귀하게 대접받았을 터인데 거의 방치되다시피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녹차 신드롬이 한창 일때가 있었는데 아, 옛날이여! 요즘은 거의가 커피 일색으로 바뀐듯 하니 이 일을 어이할꼬. 물론 커피 그 자체를 폄하하는건 결코 아니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의 전통차가 홀대받고 멀어져 가고 있다는데 아쉬움이 크다는 얘기다. 커피와

차(茶)의 조화를 한번쯤 생각해 볼 때이다. 여기서 말하는 차(茶)는 국화차, 대추차 등의 대용차가 아닌 참선 중 졸음을 이겨내지 못해 자신에게 화가 난 달마대사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꺼풀을 잘라 던졌더니 그 자리에서 자랐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오직 차나무에서 생성된 것을 말한다.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는 크게 네 종류로 분류한다. 만드는 방법에 따라 불 발효차(녹차), 반 발효차(중국산 오룡차나 철관음, 청차 등), 완전 발효차(홍차), 후 발효차(보이차)로 나눈다. 또한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제조 과정에 따라, 색깔이나 모양이 천차만별이다.

차(茶)는 범어로 알가(閼伽, argha)라고 한다. 신에게 바치는 공물을 담는 그릇의 총칭으로 쓰였다가 뒤에 불전에 올리는 맑은 물을 가리키게 되었으며, 향기로운 차를 뜻하게 되었다. 차는 약리적으로 몸 속 노폐물과 독소 배출에 으뜸

이다. 성인병 예방, 중금속 해독을 돕고 다이어트는 덤이다. 들뜬 기운을 가라앉히고 뇌파를 안정시키게 함은 최고의 덕목이다.

차는 차나무 잎 그 자체지만 차가 되는 순간 더이상 차나무 잎이 아닌 것이다. 차는 자연이 인간에게 제시하는 또 하나의 자연이다. 차는 자연의 지문이며 신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차를 맛보는 것은 우주를 맛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하다.

차는 차나무 잎 한 가지로만 만든다. 그런데도 맛 향기 색깔 기운이 일반적인 음식과 비교해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하나이면서 모든 것이라는점, 이것이 차의 미학적 근원이다.

'하나에 모두가 있고 많은데 하나 있어, 하나가 곧 모두이고 모두가 곧 하나이니, 한 작은 티끌 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세계가 다 들었네.' 신라 의상대사의 법성게의 한 구절이 떠 오른다.

'다여군자 성무사(茶如君子 性無邪)', 즉 차는 군자와 같아서 그 성정(性情)에 삿됨이 없다고 하였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주로 먹는 음식을 보라고 한다. 그 음식에 내포된 성정과 기운이 그 사람을 형성한다는 뜻이다. 차와 마주한다는 것은 마음과 마주한다는 것, 차는 마음의 때와 얼룩을 씻어내는 정화수이며, 침묵의 노래 곧 명상의 길 안내자이다.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써보낸 '명선(茗禪)'이라는 작품은 차와 선(禪)이 한 맛으로 통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차는 몸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마시는 것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차를 얼마나 즐겨 마셨으면 밥과 동일시하여 다반사(茶飯事)란 말이 생겼을까? 차와 곡식이 얼마나 귀했고 이들의 보관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차곡차곡(茶穀茶穀)이란 말도 그렇고, 차를 보관하는 조그만 방이란 의미의 용어 다락방도 그렇다. 또한 차를 마시면서 얼마나 예의를 중시했으면 차례차례(茶禮茶禮)라는 말까지, 차는 이렇게 우리생활 속에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는 것이다.

님들이시여 부디 차를 가까이 하시라! 그리하면 님의 육신과 영혼의 수승(殊勝)함을 얻게되리니.

《차를 마신다는 것》
/최진태

한송이 차꽃에서
한 잔의 차 맛까지
수억년의 세월감아 되돌아온
광대무변한 우주의,
허공 속 소식이요
춤사위 몸짓 한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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