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가 삼일절,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며 조상들의 얼을 기렸다.

몇 해 전 개봉했던 영화 <봉오동전투>는 위대한 장군 홍범도가 아닌 독립전쟁의 현장을 누볐던 민초들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 땅의 민초들은 극악한 세월을 어떻게 뚫고 나갔는지, 이 나라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 알게 된다.

그런데 데자뷔 같은 영화 포스터를 보며 궁금한 게 있다. 독립 의병들이 들고 있는 저 총은 어디서 났을까? 쏟아진 저 총알들은 어디서 구했을까? 여기서 체코라는 나라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이 무기들은 체코 군대에서 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가면 체코로부터 사들인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체코와 조선의 인연 이야기를 살펴보자.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체코는 300년 가까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오-헝 제국이 세르비아를 공격하고, 세르비아와 같은 슬라브계인 러시아가 참전했다.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는 세르비아 편에서 오-헝 제국의 동맹인 독일과 싸웠다.

체코는 대러시아 전쟁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체코 군인들은 같은 슬라브계인 러시아에 대거 투항했고, 러시아군 내에 체코인으로 이뤄진 부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1917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볼셰비키는 독일 등과 조약을 맺고 1차 세계대전에서 발을 뺀다. 체코 군단이 전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당시 파리에 있던 체코 망명정부의 지시에 따라 체코 군단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이동하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18년 4월경 선발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그런데 얼마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체코는 독립을 성취한다. 전쟁이 끝났으니, 쓸모없어진 무기를 팔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비를 마련한다.

항일 투쟁을 위해 간절히 무기를 원하던 독립군들이 이 무기를 사들인다. 소총 1천200정, 기관총 2정, 박격포 2문, 탄약 80만 발 등이었다. 하지만 비용과 수송이 문제였다. 노동자 한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소총 값은 누가 대어주었을까? 북간도 제1의 거부이자 독립군의 자금을 책임졌던 최운산 장군과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의 기둥 역할을 하던 성공한 사업가 최재형 선생 등이 자금을 댔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체코의 벼룩시장에 쏟아져 나온 조선인들의 반지와 은비녀, 놋요강 등은 체코군이 건넨 무기와 맞바꾼 독립자금의 실체를 보여준다. 그랬다. 독립전쟁은 군인들만 한 게 아니다. 1800년대 후반부터 궁핍과 학정을 피해 주린 배를 부여잡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와 연해주에 정착했던 백성들이 독립 전쟁의 중심에 있었다. 제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이들이 반지와 비녀를 팔아, 놋그릇까지 팔아서 군자금을 마련했다.

북로군정서 이범석 장군의 부대가 체코부대로부터 사들인 무기를 북간도로 이송한 것도 이들이었다. 9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릴레이 방식으로 무기를 옮겼다. 그렇게 해서 봉오동 전투(1920.6)와 청산리 전투(1920.10)의 승리가 가능했다. 그 땀과 눈물, 희생으로 오늘 우리의 삶이 가능하다.

통영은 이순신의 바다이고, 통영 사람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 하지만, 정작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은 통영 사람이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이 나라, 이 바다를 목숨으로 지켜낸 이들 말이다. 2만여 명에 이른 수군을 먹인 것도 백성이고, 150여 척의 전선을 만든 것도 백성이고, 물때와 물길을 안내해 싸우기 전에 승리를 확보한 것도 백성이다.

그런데 충렬사도 착량묘도, 한산도 충무사도 이순신 장군의 넋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는데, 그와 함께 한 통영 백성의 제사를 지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영화 포스터에 자꾸 눈이 가는 이유다.

저자 주. 체코와의 인연 이야기는 김동우 저자의 <뭉우리돌의 들녘>을 참조하였습니다. 김동우 사진작가는 국외독립운동사적지와 후손들을 사진에 담고 기록하는 작업을 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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